최지혜 트렌드코리아 공저자
최근 소비를 움직이는 힘이 달라지고 있다. 필요해서 사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기분’과 ‘감정’이 소비의 중심에 섰다. 사람들은 더 이상 감정을 수동적으로 흘려보내지 않는다. 오늘의 기분을 진단하고, 내일의 컨디션을 계획하며, 감정 자체를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 흐름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바로 ‘필코노미(Feel-conomy)’다. ‘감정(Feel)’과 ‘경제(Economy)’의 합성어인 필코노미는 제품의 기능보다 나의 기분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하는 소비를 의미한다. 진단·관리·전환에 이르는 감정 케어 전 과정이 하나의 시장으로 성장한 셈이다. 이번 칼럼에서는 필코노미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장면들을 짚어보고, 이 감정의 경제가 브랜드에게 어떤 새로운 과제를 던지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바텐더, 그리움 한 잔 주시오”
필코노미의 첫 번째 모습은, ‘기분을 읽고 기분에 맞춰 추천하는’ 기분 큐레이션 시장의 성장이다. 2025년 5월, 일본 주류회사 ‘산토리(Suntory)’는 도쿄 시부야에 색다른 팝업 바 ‘글래스 앤 워즈(Glass and Words)’를 열었다. 이곳에선 칵테일 이름이 아닌 ‘기분’을 주문한다. 바 선반에는 빈 잔이 줄지어 있고, 코스터에는 설렘·그리움·짜증 같은 감정을 뜻하는 단어가 적혀 있다. 손님이 자기 ‘기분’을 고르면 바텐더가 그에 맞는 칵테일을 만들어 준다. 2024년 오픈 당시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화제가 되었고, 인기에 힘입어 2025년에는 예약 부스를 확대하고 메뉴 역시 풍성해졌다.

기분에 맞춰 칵테일을 주문하는 산토리의 팝업 바 ‘글래스 앤 워즈’ (출처: 산토리)
영화도 ‘기분’으로 검색한다. 2025년 4월, 넷플릭스는 오픈AI 기반의 기분 맞춤형 검색 기능을 시험 중이다. 장르나 배우 대신 ‘우울할 때 볼 영화’, ‘기분전환용 코미디’ 같은 감정 키워드로 콘텐츠를 찾을 수 있는 방식이다. 현재 호주와 뉴질랜드 일부 지역에서 테스트가 진행 중이며, 곧 글로벌로 확대될 예정이다. 이 기능은 시청자의 선택 기준을 ‘무엇을 볼까’에서 ‘지금 내 기분에 맞는 영화는?’으로 바꾸며, 콘텐츠 소비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나의 최애 AI 상담선생님
두 번째 양상은 불편한 기분을 다스리기 위한 소비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흐름의 중심에는 AI가 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따르면, 최근 생성형 AI의 활용 패턴이 극적으로 변하고 있다. 2024년 조사에서 AI 사용 목적 1위는 ‘아이디어 도출’이었지만, 2025년에는 ‘상담과 교제’가 최상위를 차지했다.
언제든 접속할 수 있고, 비밀이 보장되며, 아무 판단 없이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점에서 이용자들은 AI를 부담 없이 찾는다. 실제로 온라인에서는 〈불안·걱정 많은 사람의 ChatGPT 활용법〉 같은 게시글이 인기를 얻고 있다. 감정의 불편함을 돌보고 정리해주는 존재로, AI가 새로운 ‘기분 관리 도구’로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부정적 감정이 커질 만한 상황 자체를 아예 대신해 주는 서비스도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에서 빠르게 확산 중인 ‘사직 대행 서비스’다. 회사에 사직 의사를 밝히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피하고 싶은 장면이다. 사직 대행업체는 직원 대신 퇴사 절차를 밟고, 체불임금을 조율하며, 감정 소모를 최소화해 준다. 평균 2만5,000~5만 엔(약 21만~42만 원)이라는 가격표는 ‘부정적 기분 회피’를 돕는 시장가격인 셈이다.

기분전환 소비템의 대표격 프리미엄 수건, 더그란과 웜그레이테일 (출처: 한섬EQL 및 웜그레이테일 웹페이지)
내 기분을 위해선 비용도 아깝지 않아
마지막으로, 좋은 기분을 의도적으로 ‘설계’하고 ‘조작’하며 ‘디자인’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주어진 기분에 머무는 것이 아닌 원하는 기분을 능동적으로 만들고 연출하는 것이다. 짠물 소비가 당연한 요즘, 고급 프리미엄 수건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 이유는 고급 수건이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기분전환 소비템’이기 때문이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쓰는 ‘시발비용’과 유사하지만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긍정적인 기분으로의 전환, 자기만족 증진 등 모든 종류의 감정적 효용을 위한 지출을 포괄한다.
기분전환 소비의 증가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신한카드 빅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2025년 상반기 기준, 카페와 디저트 이용 건수 및 1인당 월평균 이용 금액이 2023년 상반기 대비해 늘었다. 더그란, 웜그레이테일 등 일반 제품보다 약간 비싼 프리미엄 수건 구매 건수도 증가했고, 온라인으로 꽃을 주문해 자신에게 선물하는 사람들도 갈수록 늘고 있다.
소비자의 감정을 정교하게 해석하라
현대인은 넘쳐나는 정보와 자극 속에서 사람들은 정작 자신의 ‘기분’을 세밀하게 인식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바쁨과 무기력 속에서 마음을 미뤄두는 사이, 우리는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지 못한 채 피로를 반복한다. 이때 ‘기분 소비’는 감정에 다시 접속하게 해주는 감성적 매개가 된다.
감정 소비의 확산은 기업 입장에선 데이터 중심에서 감정 중심으로의 전환을 뜻한다. 앞으로의 경쟁력은 많은 데이터를 보유하는 데 있지 않다. 그 데이터를 통해 소비자의 기분을 얼마나 정교하게 해석하느냐가 승부를 가른다. AI 추천 시스템 역시 과거 취향을 반영하는 단계를 넘어,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감정”을 제안하는 방향으로 진화할 것이다. 브랜드의 언어와 공간, 패키징까지도 감정적 울림을 설계하는 전략이 요구된다. 결국 미래의 우위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기술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얼마나 섬세하게 읽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최지혜 트렌드코리아 공저자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 서울대학교 소비자학 석·박사. <더현대서울 인사이트>, <트렌드코리아 2025> <트렌드코리아 2024> <트렌드코리아 2023>, <트렌드코리아 2022>, <트렌드코리아2021>, <트렌드코리아 2020>, <트렌드코리아 2019>, <트렌드코리아 2018>, <트렌드코리아 2017>, <트렌드코리아2016>, <트렌드코리아2015>, <트렌드코리아 2014> 공저자. 서울대에서 소비자 심리의 이해와 소비트렌드분석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삼성·LG·아모레퍼시픽·SK·코웨이·CJ 등 다수의 기업과 소비자 트렌드 발굴 및 신제품 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현재 인천시 상징물위원회 자문위원을 맡고 있으며, 한국경제신문에 <최지혜의 트렌드 인사이트> 칼럼을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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