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원 트렌드코리아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

거대서사의 시대가 끝났다. ‘한때를 풍미하는 메가트렌드’라는 개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리는 무수히 많은 ‘마이크로 트렌드’가 대체하고 있다. 2025년 7월, 유튜브가 ‘인기 급상승 동영상(Trending Now)’ 목록을 폐지한 것이 그 증거다. 유튜브는 사용자에게 가장 개인화된 미디어로 기능한다. 시청 패턴, 생활 스타일, 구독 이력에 따라 모두 다른 영상을 소비하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통용되는 종합 인기 영상 목록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최근 AI 트렌드의 핵심은 ‘초개인화(Hyper-personalization)’다. 맥킨지나 베인앤컴퍼니 같은 글로벌 컨설팅 기관들이 공통으로 주목하는 키워드다. CES 2025에서 ‘더 개인화된 AI’라는 주제가 주목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수많은 AI 에이전트는 실시간으로 사용자의 행동과 위치, 상황을 분석한다. 이를 통해 사용자에게 가장 적합한 무언가를 제안한다.

흥미로운 점은 인공지능 기술의 초개인화는 소비 경험을 필연적으로 ‘미세화(微細化)’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당신만을 위한’ 추천이 아니다. ‘당신이라면 지금 딱 이것만’ 필요하다는 세밀성이 중요하다. 개인화된 AI는 소비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축소시킨다. 예컨대 ‘취향에 맞는 브랜드’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필요한 브랜드’를 고르는 방식이다.

소비 시장에서 ‘작은 경험’ 선호는 뚜렷하게 나타난다. 예전의 ‘샘플’은 커다란 본 제품을 살 때 끼워주는 덤이었다. 요즘은 애초에 샘플을 판매한다. 글로벌 소비자 분석 전문 기관 민텔의 리포트 ‘The Future of Fragrance 2025’에 따르면, 소비자들은 본품 가격과 맞먹는 소용량 향수 샘플 세트를 합리적으로 여긴다. 유행 수명이 짧아지면서 소비 여력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작은 용량 제품은 큰 비용 없이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현명한 선택지가 된다. 이처럼 샘플 몇 병이 담긴 세트는 ‘디스커버리 키트(Discovery Kit)’ ‘센트 라이브러리(Scent Library)’ 등으로 새롭게 명명된다.

소용량 선호는 건강기능식품 분야에서도 나타난다. 헬스테크 기업 모노랩스의 서비스 ‘아이엠(IAM)’은 AI 문진을 통해 개인 건강 상태를 분석한다. 그 결과에 맞춰 꼭 필요한 영양제만 1회분씩 개별 포장하여 받을 수 있다. AI의 정확한 분석을 따르면서 한 달 단위로 부담 없이 섭취를 시작할 수 있어 재구독률이 높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소분 제품이라도 개인마다 다른 경험으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누구에게는 ‘건강관리’가 되고, 누구에게는 ‘비용 절약’이 된다.

인공지능 기술에서도 최근 ‘적정 규모’가 화두다. ChatGPT의 놀라운 성공 이후, 이 같은 거대 언어 모델(LLM)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한 수많은 시도가 이루어졌지만, 그 한계도 명확했다. 단순한 문서 분류에 최신 LLM을 쓰는 것은 비용과 시간 낭비였다. 이제 기업들은 업무 성격에 맞는 경량화된 전용 모델이나 특정 업무에 특화된 AI를 선택한다. ‘가장 최신의 AI’가 아니라 ‘우리 상황에 가장 알맞은 도구’를 찾는 접근이 현명한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스켈터랩스는 이를 ‘Too Much AI에서 Right-Sized AI로의 전환’이라 명명했다.

마케팅 리서치 그룹 시부야109 랩(SHIBUYA109 lab.)의 연구에 따르면, Z세대가 원하는 ‘경험’은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다. 오히려 일상의 연장선에 있는 소소한 비일상이다. 적정 규모 AI는 이 작은 순간을 지원한다. 카카오맵의 ‘AI 메이트 로컬’은 사용자의 현재 위치를 기반으로 대화 형식으로 조건을 입력하면 ‘지금 딱 맞는’ 장소를 추천한다. 거대하게 느껴지던 AI가 나의 일상적 ‘순간’을 뒷받침하는 셈이다.

‘나만의 작은 경험’을 원하는 소비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는 ‘최소기능제품(MVP)’을 꾸준히 제안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완벽한 제품을 위해 준비에만 몇 년을 소모하는 것은 위험하다. 시장 불확실성이 크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직 부족한 ‘베타’ 상태라도 일단 소비자에게 선보여야 한다. 이후 끊임없이 업데이트하는 전략이 더욱 유효하다. 완성도보다는 고객과 꾸준한 호흡이 고객 만족도를 높이는 핵심이다.

다음으로는 맥락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 소비자들이 작은 경험을 추구하는 이유는 제각각이다. 작은 경험은 젊은 세대에게는 ‘찍먹 문화’가 되고, 중장년층에게는 ‘자원 낭비 방지’가 된다. 고소득층에게는 ‘프리미엄 샘플링’이 될 수도 있다. 같은 상품이라도 고객마다 다른 이야기로 포장해야 한다. 이때 AI를 활용하면 최대 다수의 작은 경험을 지원하는 전략을 실행할 수 있다.

고객의 구매 여정은 이제 예측 가능한 실선이 아니다. 잠깐 반짝였다 사라지는 점에 가깝다. 따라서 브랜딩은 짧고 결정적인 고객과의 만남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 브랜딩의 목표는 긴 여정에서 반드시 들러야 하는 경유지가 될 필요가 있다. 그 경유지는 거대한 세계관이 아니라, 소비자의 기억에 남는 하나의 ‘작은 경험’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이탈 이후에도 다시 떠올릴 수 있는 여운을 남겨야 한다.


이혜원 트렌드코리아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 <대한민국 외식업 트렌드 vol.1, vol.2>, <K뷰티 트렌드> 및 <김난도의 미래 트렌드 연구실>시리즈의 공저자. 서울대 소비자학 학사·석사·박사로, 대한출판문화협회·다산북스·리더스북·카카오페이지 등에 재직한 바 있다. 대구TBN ‘Trend A to Z’ 코너의 고정 패널이며, 《전시저널》, 《KEPCO》에 트렌드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고려대 국토계획공기업 고급정책과정에서 ‘소비사회와 트렌드’를 강의했고, 국토교통부 정책홍보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다양한 분야의 기업과 공공기관, 도서관에서 트렌드 강의와 소비자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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