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규(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연구위원)
올해 5월 더현대 서울에서 어느 아이돌의 팝업스토어가 열렸다. 누적 참가자만 1만 5000명, 올해 가장 흥한 팝업스토어 중 하나인 이 행사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다. 웹소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에 등장하는 가상 아이돌, 소위 ‘활자돌(활자+아이돌)’이다. “현생에선 공시생이었던 내가 눈 떴더니 아이돌!” 소위 ‘이세계물’의 아이돌 버전인 셈인데. 이 캐릭터를 현실에서 만나기 위해 수많은 팬들이 모인 것이다.
‘서브컬처’ 콘텐츠가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다. 비주류 문화에서 지상파 방송까지, 마니아들의 콘텐츠에서 대기업 콜라보까지. 자신의 영역을 한없이 넓히고 있는 서브컬처의 인기 이유를 살펴보자.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팝업 현장 및 홍보이미지 (출처 : KW북스 굿즈 스토어 인스타그램)
2020년대의 서브컬처는 90년대 서브컬처와 달라
한국에서 서브컬처가 본격적으로 퍼지던 1990년대, 서브컬처는 주류문화의 대칭점에 위치한 비주류적이고 소수적인 문화를 일컫는 말에 가까웠다. 기존의 대중문화의 문법을 벗어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며 마니아들에겐 매혹적인 대상이자 자신들 삶의 방식을 효과적으로 표출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마니아들의 전유물이던 90년대의 서브컬처는 2020년대에 오면 큰 변화를 맞았다. 대중에게 널리 퍼지며, 어떤 서브컬처는 이제 주류 대중문화에 가까워졌다. 대표적인 서브컬처로 여겨졌던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은 즐기는 사람 숫자나 산업 규모 면에서 다른 대중문화와 비슷하거나 그것들을 뛰어넘는다. 경주마를 여성으로 의인화시킨 게임 ‘우마무스메’는 올해 3월 기준 글로벌 판매 누적 매출이 20억 달러가 넘었다. 2022년 네이버의 웹소설, 웹툰 매출은 1조 664억원으로, 네이버의 콘텐츠 매출 대부분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서브컬처 콘텐츠의 인기와 함께 서브컬처 향유자들을 소수자로 보는 시선 역시 희미해지고 있다.
글로벌 매출 20억 달러를 넘긴 게임 우마무스메 (출처 : 우마무스메 유튜브 채널)
잡지, 인터넷, 1인 방송과 같이 서브컬처에 비교적 친화적인 모습을 보이는 미디어뿐 아니라, 그동안 서브컬처나 그 향유자들을 긍정적이지 못한 대상으로 간주하고 거리를 두던 전통미디어(종합일간지, 지상파방송 등)에서도 팬, 마니아, 덕후를 빈번하게, 그것도 긍정적인 모습으로 소환한다. 후술하겠지만 주류 대중문화가 서브컬처와 관계 맺는 사례가 점증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더 이상 문화적 하위성을 띤다고만 볼 수 없는 서브컬처를 여전히 ‘하위문화’나 ‘소수문화’로 번역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처럼 미디어 환경 변화, 서브컬처의 산업화, 산업의 서브컬처화 등으로 서브컬처의 경계를 말하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다. 서브컬처를 특정 장르(만화, 컬트무비 등)나, 과거의 특징(일탈, 방항 등)으로 범위를 축소해 의미를 명확하게 만드려는 시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서브컬처를 사회 내에서 이뤄지는 유동적인 상호작용 중 하나이며 전체 문화에 ‘다양성을 부여하는 문화’로 파악하는 것이, 그것이 지닌 가변적이고 생성적인 특징을 포착하는데 유용하다.
미소녀 게임 블루 아카이브와 프랭크 버거 콜라보 이벤트(출처 : 넥슨 홈페이지)
콘텐츠 홍수 시대, 서브컬처에서 참신함 찾아
서브컬처는 언젠가부터 대부분의 대중문화 장르에서 일종의 상업적 코드로 각광받으며 그 위상을 넓혀가고 있다. 실은 서브컬처가 아니지만, 일부러 서브컬처적 정서를 연출해 특정 효과를 얻고자 한다는 것이다. 저예산으로 단기간에 만든 것처럼 꾸미거나,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자유분방하고 오락적 · 자극적인 스타일을 추구하는 콘텐츠들이 대표적이다. 더불어 이야기 전개가 탈개연적 · 비약적이고, 느슨하거나 비논리적인 콘텐츠들도 서브컬처적 요소로 빈번하게 활용된다. 특유의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그림체(그래픽)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대중문화가 서브컬처를 활용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참신한 콘텐츠를 원하는 기업과 소비자들이 늘어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콘텐츠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에 창의적인 콘텐츠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콘텐츠는 더 많다. 성공하는 콘텐츠가 나오면 유사한 콘텐츠가 우후죽순 쏟아지는 상황에서 콘텐츠의 창의성과 다양성은 유지되기 어렵다. 결국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독보적 위상을 갖는 마이너 리그가 존재하기 어려워진다. 이런 상황에서 서브컬처는 특유의 정서와 코드를 통해 기존 주류 콘텐츠의 문법과 공식에서 벗어난 재미와 자유로움을 느끼게 만든다.
게임 ‘검은사막’과 라면 왕뚜껑의 콜라보 제품 (출처 : 검은사막 홈페이지)
자신만의 취향 찾는 MZ 세대, 서브컬처에 긍정적
주류 대중문화에서 한 발 벗어나 다양성을 포용하고, 자신만의 취향을 중시하는 MZ 세대의 트렌드 역시 대중문화의 서브컬처화에 한 몫 하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이 대중화되면 오히려 그에 대한 소비를 줄이거나 중단하고, 새로운 자신만의 애호 대상을 찾아 관심을 옮겨가는 이들에게 모두가 좋아하는 ‘주류’는 매력이 없는 법이다. 하지만 주류 속 비주류, 주류 대중문화 속 서브컬처적 요소는 그런 현대판 힙스터나 스놉(snob)들까지도 포용할 가능성을 갖는다. 역으로 완전한 서브컬처가 부담스러웠던 이용자들은 보다 덜 부담스럽게 서브컬처적 요소를 담은 주류 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 이처럼 주류 속 비주류는 완전한 주류나 비주류와는 다른 제3의 경험을 줌으로써 기존 이용층과 까다로운 이용 층 모두를 끌어당긴다.
MAU(월간 활성 사용자)가 800만명이 넘는 네이버 웹소설 홈페이지 (출처 : 네이버 웹소설)
어떻게든 서브컬처적임을 드러내는 콘텐츠들이 많아지고 있으며, 오히려 서브컬처적인 정서를 완전히 제거한 콘텐츠들은 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대부분의 콘텐츠에 서브컬처적 정서가 은밀히 숨어 있거나, 의도와 다르게 만들어지기도 하며, 이용자의 경험이나 욕망과 마주침으로써 서브컬처적인 것이 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서브컬처가 보편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서브컬처 자체의 성장도 필요해
서브컬처의 보편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서브컬처를 사라지게 만드는 효과도 낳는다. 서브컬처적인 코드를 전면에 내세워 서브컬처 콘텐츠를 만드는 경우보단, 주류 대중문화의 재미요소로 녹여 넣는 모습만 이어지면 서브컬처는 서브컬처로서의 힘을 잃는다. 서브컬처가 서브컬처이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소수의 열광적인 추종자가 나타나고, 그들에 의해 콘텐츠가 끊임없이 재/해독되어야 한다. 일견 유치하고 특이해 보이는 것이 이용자들의 굉장히 적극적인 해독행위와 만나 계속 진지하게 읽힐 때 서브컬처가 지속될 수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 서브컬처는 주류 대중문화에 자유로움과 신선한 매력을 더할 수 있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런 역할이 이어지려면 서브컬처 단순히 눈을 즐겁게 하는 소재 정도로 끝나선 안 된다. 마니아들이 그 속에 계속 머물며 깊게 즐길 수 있는 모습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다양한 형태로 창작되고 기획되며 진화할 때 서브컬처는 대중문화를 풍요롭게 만드는 존재로 성장할 것이다. 서브컬처 콘텐츠가 더 많이 기획되고 만들어지고 이용돼야 하는 이유다.
강신규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연구위원.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게임, 방송, 만화, 팬덤 등 미디어/문화를 연구한다. 문화이론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개인정보보호위원회 홍보전략 자문위원, 한국게임정책자율기구 게임광고자율규제위원 등으로도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