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정 만화콘텐츠스쿨 교수

요즘 세계관이란 말이 유행이다. 영화, 드라마를 넘어 브랜드들 역시 캐릭터와 세계관을 이야기하고 있다. 세계관을 만들어 소비자를 브랜드에 푹 빠지도록 만들려는 목적일 테다. 이번 칼럼에선 마케터 독자들에게 세계관을 만드는 조금은 특별한 방법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세계관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스토리텔링, 스스로 찾아보다가 빠져들게 만드는 묘한 세계관. 소위 불친절한 세계관이 주는 매력을 게임을 통해 풀어가 보고자 한다.

한때 베데스다의 ‘스카이림’이란 게임에 푹 빠져서 한동안 일상생활을 하지 못했던 적이 있다. 베데스다라는 게임사가 만드는 게임은 정해진 스토리대로 진행되는 일반적인 게임과 달리 높은 자유도로 다양한 일들 해볼 수 있다. 스카이림의 경우 판타지 중세 배경에서 용사가 되든, 도둑이 되든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

자유도 높기로 유명한 게임 스카이림 (출처 : 엘더스크롤 홈페이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자유도 높은 세계의 매력

스카이림을 플레이하는 많은 게이머가 그렇듯 나 역시 주어진 퀘스트를 하는 것을 넘어 (치트를 포함해) 시스템이 허용하는 모든 것을 하려고 했다. 사람 머리를 모으기도 해 보았고, 마을 주민 NPC들과의 호감도를 잔뜩 올린 뒤, 머리에 통을 씌워서 나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고 미션을 클리어 했다.

이런 모든 것을 했던 이유는 ‘해보니 가능했기’ 때문이다. 몇몇 불가능한 일들도 있었지만 정말 많은 것들이 게임 속에서 가능했다. 말하자면 이 게임의 자유도란 것이, ‘어디까지 가능하게 설계해 놨는지’에 대한 내 호기심을 자극했고, 그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나만의 퀘스트를 스스로에게 부여했던 셈이다.

무엇을 할 것인지 목표를 스스로 정하는 게임 마인크래프트 (출처 : 마인크래프트 공식 유튜브)

2009년에 발매된 샌드박스 게임인 마인크래프트는 어린이들에게는 여전히 최고의 게임이다. 이런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래서 여기서 뭘 해야 하는 거야?’라고 묻는다. 그러나 수많은 마인크래프트 마니아들은 ‘저 산이 거슬리는데 하나 깎아볼까?’ 같은 기획을 떠올리는 순간, 그 목표가 끝날 때까지 차마 키보드와 마우스를 놓을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알려주는 게 없으니 스스로 알아내고 싶네

출시 후 전 세계 2000만 장이 넘게 팔린 인기 게임 ‘엘든링’. 이 게임을 만든 회사 프롬 소프트는 대대로 어려운 게임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절벽에 떨어져서 사망, 지나가는 늑대에게 물려 사망. 주인공이 하도 자주 사망해 해당 장면에 뜨는 ‘유다희(YOU DIED)’란 문장은 인터넷 밈까지 되었다. 그런데 이 게임의 어려운 점은 난이도뿐만이 아니다. 게임 속에서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것이 거의 없어 게이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 “문이 열리고 웬 기사가 뛰어나와 공격하는데, 이유는 뭐지? 앗! 죽었구나.” 이런 식이다.

어려운 난이도에 불친절한 설명으로 유명하지만 전 세계 2000만장이 넘게 팔린 게임 엘든링 (출처 : 반다이 남코 홈페이지)

극악의 난이도에 불친절한데도 불구하고 마니아가 형성되어 있다. 유저들은 이 안에서 세계의 비밀을 하나라도 더 알아내려고 분석과 해석을 거듭하고 공유한다. 마케팅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악수인, ‘뭘 해야 하는지 설명해 주지 않음.’ ‘스스로 알아내시오.’ 같은 태도로 오히려 환영받다니 대체 무슨 이유일까?

사람들은 어떻게 게임에 몰입될까?

사람을 어떤 게임에 몰입시키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차근차근 치밀하게 디자인한 퀘스트를 부여해 유저로 하여금 중간에 놓을 수 없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 경험치 수치와 레벨 숫자를 표시해서 레벨 올리는 재미를 줄 수도 있고, 아이템 수집 욕구를 자극할 수도 있다(마케팅에서는 포켓몬 스티커 같은 것일 테다). 랭킹을 표시해 경쟁시키는 방법도 있고, 커뮤니티를 유도해 한 사회 속의 구성원이 되어 삶의 일부가 되게 만드는 방법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전제는, 하나로 매끄럽게 연결되는 이야기 바탕, 흔히 ‘세계관’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산적이 되든 상이이 되든 모든 게 자유인 게임 스카이림 (출처 : 엘더스크롤 홈페이지)

게임에서의 세계관은 이야기와 사건이 잠재된 시공간이다. 그렇다면 세계관이란 걸 만든 다음, 불친절한 공간에 사건과 정보를 여기저기 숨겨 놓기만 하면 사람들이 스스로 탐험하면서 몰입하고 즐길 수 있는 걸까? 오픈월드와 샌드박스 게임, 즉 스스로 원하는 걸 정해 플레이하는 게임들이 다른 게임보다 항상 더 성공적일까? 마케터 독자에게 맞춰 이야기한다면, 어떤 광고인데 궁금증만 불러일으키고 무엇인지 안 알려주면 무조건 그게 더 효과적일까? 미스터리처럼 이야기를 숨겨놓으면 알아서 풀어주는 걸까?

물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티저 광고라고 항상 성공하는 게 아니듯, 세계관이 있고, 그것이 숨겨져 있다는 것만으로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진 않는다. 자칫하면 ‘불친절한 세계관, 딱히 재밌지도 않은데 떠먹여 주지도 않는 걸 굳이 내가 왜 힘들게 찾아봐야 돼?’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세계를 탐험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게임의 몰입에 대해 연구했는데, 반복되는 주요 개념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환상의 공간, 가면(아바타)을 이용한 역할 참여, 도전감, 통제감, 탐험적 행위, 최적의 자극 수준, 즐거운 경험 등이다. 즉 탐험할 수 있는 매력적인 세계(공간)이 있어야 하고, 내가 되고 싶은 역할이 있어야 한다. 너무 랜덤한 사건이 발생하기보다, 내 행동에 대한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어느 정도는 예측이 되어야 하며,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킬 약간의 난이도나 경쟁이 필요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이 과정이 즐거워야 한다.

자유도 높은 우주 배경 오픈월드 게임 스타필드 (출처 : 베데스다 홈페이지)

특히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건, 내가 무언가를 새로 발견하거나 세계의 비밀을 알아냈을 때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느냐는 것이다. 보상에 대한 기대가 참여를 유도하기 때문이다. 이 카드를 뽑은 사람은 이 서버에서 몇 명 밖에 없고, 이 이스터에그를 찾은 사람은 전 세계에서 3% 밖에 없고, 게임의 미구현 맵을 어떻게 해서든 억지로 들어가 본 뒤 인증 캡처 이미지를 올린 유일한 사람이고, 영화의 이 디테일을 먼저 발견한 사람은 나밖에 없어서 남들은 모르는 진실에 도달했다는 성취감이 보상이 된다. 또한 이런 게 성취감이 되려면 이 세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커뮤니티가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한다. 커뮤니티 내에서 숭배받아야 하는데, 커뮤니티가 없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커뮤니티의 관심 역시 탐험의 동기가 돼

글 처음에 소개한 ‘스카이림’이라는 게임으로 돌아가면, ‘스카이림에서 이런 행위를 처음 발상해 내서 시도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래서 이런 것까지 된다는 걸 알아냈다고?’ 이런 것도 보상이 된다. 나는 친구들에게 ‘NPC 호감도 올리고 몰래 죽이면 유산을 받을 수 있어.’라고 자랑스럽게 알려준 뒤, 그들의 흔들리는 눈빛에서 충분한 보상을 얻었다.

보상 개념을 생각하면 유명한 ‘파맛 첵스 사태’도 이해된다. 코코아맛과 파맛 두 맛 중 어느 맛을 원하는지 온라인 투표를 받았지만, 사람들은 브랜드의 기대와 달리 파맛을 선택했다. 사람들은 흔하고 시시한 코코아맛보다는 ‘파맛 첵스’라는 흥미로운 기획에 스스로 참여하며 ‘내가 파맛 첵스를 탄생시킨 사람 중에 한 명이야!’라고 스스로 뿌듯해했고, 온라인 이용자들에겐 영웅이 되기도 했다.

스스로 참여 방식을 정할 때 소비자는 더욱 몰입해

이제 결론이다. 불친절한 세계관으로 사람들을 몰입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흥미를 끄는 잘 만든 세계관이 기본 전제지만, 자유도가 높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유저들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려면 무엇보다도 탐험을 통해 세계를 알아냄으로써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를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상을 공유하고 동기를 불러일으킬 커뮤니티가 있으면 더 좋다. 1) 흥미로운 세계관, 2) 탐험하며 얻는 재미와 보상, 그리고 3) 이 모든 것을 지지하는 커뮤니티(집단) 이 세 가지가 핵심이다.

세계 곳곳을 탐험하다 발견한 무언가(아이템, 힘, 동료)는 큰 보상이 된다, 게임 스타필드 속 한 장면 (출처 : 베데스다 홈페이지)

이것들이 성공적이라면 사람들은 스스로 수행할 퀘스트를 계획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정해준 퀘스트가 아닌, 스스로 정한 퀘스트는 다른 무엇보다 중독적이다. 바로 이것이 불친절한 세계관이 성공하는 방식이다. 스토리와 세계관을 통해 소비자를 브랜드에 끌어들이고 싶은 마케터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전혜정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교수

학사-석사-박사 모두 디자인을 전공했고, 오디오 콘텐츠 사업도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대학에 스토리텔링을 가르치게 되었다. 록음악과 장르물, 게임 그리고 미드저니를 좋아하는 오타쿠이며. 게임 취미를 바탕으로 ‘G식의 밤’ 등 여러 채널에서 게임과 스토리텔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