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기획 강태구 프로 (메타버스 사업팀)
메타버스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이 있지만, 이들의 종착점으로 그리는 미래는 비슷하다. 이머시브 익스피리언스(Immersive Experience), 흔히 말하는 실감형 콘텐츠로 이루어진 가상공간이다. 마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 과 같이 사용자가 여러 디바이스를 통해 현실 공간과 거의 같은 체험을 가상공간에서 겪는 것이다. 이 종착점에 다가갈 날이 ‘아직 멀었다’라고 하느냐, ‘곧 온다’로 하느냐에 따라 메타버스에 대한 전망은 비관적, 또는 긍정적으로 갈리게 된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건 기술의 성장이 멀었다 아니다가 아닌 이런 미래의 공간을 만드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메타버스만의 문제가 아닌 디지털 트렌스포메이션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모든 주체들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나라의 현실을 봤을 때, 메타버스의 종착점이 한국 시장에선 가깝게 있지 않을 것 같다.
녹색 배경에서 손짓 발짓은 안녕, 실감 더한 버추얼 프로덕션
(출처: AmazeVR 이머시브 콘서트의 구현 모습)
지난해 메타버스 바람이 불었을 때 가장 주목받았던 분야 중 하나가 버추얼 프로덕션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기존에 VFX라고 불리던 특수효과가 한층 업그레이드된 형태로 일정과 기간을 단축하고 효과는 더욱 강화한 제작 방식이다. 디즈니의 주요 프랜차이즈 스타워즈 ‘만달로리언’ 드라마를 통해서 가장 많이 알려진 이 제작 방식은 ‘먼저 촬영된 영상에 CG를 덧입혀서 특수효과를 나타낸’ 기존 공정에서 나아가, ‘촬영과 동시에 사전 제작된 CG를 덧입히거나 아예 만들어 놓은 CG 배경을 대형 LED 화면에 틀어 놓고 이를 그대로 촬영’한다. 이렇게 되면 후반 작업은 거의 필요 없고, 기존에 해외 로케이션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던 컷들을 스튜디오 안에서 처리하여 비용과 작업 시간을 혁신적으로 단축시키는 영상 제작 프로세스다.
여기에 더해 생방송에서 미리 작업한 CG를 붙여서 송출이 가능한 실시간 라이브 특수효과까지 가능하다. 이런 작업 안에서 만들어진 콘텐츠는 출력 디바이스가 HMD 이건, 모니터이건 상관없이 한층 이머시브한 결과물을 선보일 수 있다. 작업하는 사람들, 특히 배우들 같은 경우 기존의 초록색 벽에서 허공에 대고 연기를 하는 것보다 한층 더 감정이 몰입된 상태에서 자신을 모니터링하면서 결과물을 낼 수 있기에 말 그대로 이머시브한 퍼포먼스를 할 수 있다.
버추얼 프로덕션, 제작 과정의 비효율을 없애다
(출처: 영화 제작자들에게 새로운 제작 파이프라인을 선사한 ‘The Mandalorian’ By. Jeff Farris)
영화와 드라마를 중심으로 진행된 이러한 버추얼 프로덕션의 사례들이 점차 퍼지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크고 작은 회사들이 3D 월을 활용한 버추얼 스튜디오를 갖추고 메타버스의 성공 사례를 만들어 내고 있고, 상황에 따라 크고 작은 형태로 이러한 기술과 인프라를 활용한 콘텐츠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다들 결과물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한 체 진행해서 크고 작은 문제들을 일으키곤 한다. 바로 제작 프로세스다.
사실 버추얼 프로덕션은 제작 프로세스를 혁신적으로 바꾸기보다는 기존의 비효율적인 제작 프로세스를 전환한 것이 핵심이다. 콘티를 통해 합의된 내용을 찍고, 영상을 촬영한 뒤 촬영된 컷들을 이리저리 붙여 제일 좋은 편집을 만들고, 베스트 편집에 CG의 후반작업을 하는 것이 기존 제작 방식이었다. 이 과정 중 편집이나 촬영 과정, 또는 최종 리뷰에서 부족하거나 추가적인 아이디어가 나오면 다시 수정해서 편집, CG를 다시 한다. 이게 업계의 공식이었다. 이러다 보니 영화든 CF든 후반 과정에 전혀 다른 아이디어(가령 산이 아니라 바다로 배경을 바꾸자)가 리뷰상에서 나오게 되면 비용이나 시간은 더 들지만 어떻게 해서든 가능하게 해 왔고, 그 과정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져 왔다.
(출처: The Virtual Production Field Guide. By. Noah Kadner)
한데 버추얼 프로덕션 환경에서는 이와 상당히 다른 과정을 거친다. 콘티를 통해 합의가 되면 배경, 동선 등 디테일한 것들까지 확정된다는 가정 하에 바로 CG 작업이 들어가고, 완성된 CG 작업을 가지고 촬영 현장에 바로 대입을 하면서 맞추어 간다. 그러고는 후반에서는 미세한 디테일만을 조정하게 된다. 이러다 보니 CG의 디테일을 잡을 시간을 상대적으로 많이 확보할 수 있고, 완성도도 높아지게 된다. 즉 의사결정이 과정 초기에 대부분 확정되어야 고퀄리티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결과물 보고 내용 바꾸는 관행, 제작 더욱 힘들게 만들어
문제는 감독, 광고주, 대행사, 투자자, 제작자의 의사결정 관행이다. 후반 수정이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일해오던 시스템이 이런 버추얼 프로덕션 작업 프로세스에서 갑갑함을 느끼거나, 무리하게 뒤엎었다가 일정을 맞추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속칭 ‘나중에 나오는 것 보고’ 판단하다가는 돈과 시간이 두 배가 드는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또한 ‘프리 프로덕션 미팅’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사전 작업을 이전보다 몇 배는 더 많이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에 당황하여 어찌할 바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과연 버추얼 프로덕션 만의 문제일까. 메타버스 공간 사업이나, XR 콘텐츠, NFT 사업에도 다 마찬가지다. 크든 작든 모두 사전 기획과 합의가 이전보다 훨씬 중요해지고, 만드는 사람들, 특히 최종 의사결정자들이 초반 60~70%의 완성품을 보고 후반 최종 완성품을 예측해야 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해진 것이다. 이런 작업 프로세스는 위계에 기반하고 실무 권한이 낮은 시스템에서는 작동하기 어렵다. 결국 메타버스와 같은 고도의 완성도를 요구하는 사업에서의 핵심은 실무 중심의, 사전 준비와 예측을 기반으로 한 신속한 의사결정에 있다. 아무리 기술적 요건이 뛰어난 회사들도 이전과 같은 프로세스와 생각으로 작업한다면 절대로 성공적인 결과물을 정해진 시간과 비용으로 만들 수 없다.
성공 결과만이 아닌 제작 과정에 주목해야
사람들은 넷플릭스의 성공을 보면서 부러워하고 OTT라는 새로운 채널 파워를 감탄하곤 한다. 하지만 사실 그 성공의 기반엔 기존과 달리 개선된 제작 프로세스가 있다. 넷플릭스뿐일까. 수많은 혁신은 바로 이런 프로세스 개선에서 온다. 제작자의 권한을 강화하고, 신속한 의사결정을 내리며, 사전 준비를 체계화하는 것. 어떻게 보면 수 십년 전부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주장해온 것들이지만 미뤄왔던 것들이 어디선가는 현실화되고 있다. 자.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의 생각과 행동에 따라 메타버스는 수십년 뒤일 수 있고, 당장 몇 개월 뒤로 올 수도 있다.
제일기획 강태구 프로 (메타버스 사업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