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식 문화평론가
K콘텐츠는 이제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 사례에서 보듯, 국적이나 자본의 출처와 상관없이 ‘K다움’이라는 고유한 특성이 글로벌 팬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K콘텐츠는 단순한 스타일로 정의되지 않는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점은 그 중심에 있는 ‘팬심’이다. 팬심은 단순한 취향을 넘어, 특정한 가치를 향한 열정이자 지속적인 소비를 만들어내는 힘이다.

K콘텐츠의 스타일에만 집착하면 이런 팬심을 저버릴 수 있다. 최근 글로벌 팬덤을 거느린 ‘오징어 게임 시즌3’나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이 대표적이다. 반대로 웹툰 원작 영화 ‘좀비딸’이나 ‘케데헌’은 팬심을 충실히 반영한 사례다. 충성도 높은 팬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절대가치다. 이는 K콘텐츠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독특하고 구별되는 가치다.
절대가치와 보편가치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이타마르 시몬슨 교수는 행동의사결정 이론의 대가이자, 행동경제학을 마케팅에 적용한 선구자다. 그는 초기 연구에서 숫자, 글자 배열, 가격 구간 같은 인지적 프레임이 소비자의 선택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30여 년의 연구를 돌아본 뒤, 저서 <절대가치>에서 스스로 본인의 가설을 부정했다. 숫자와 글자의 조합으로 소비자의 선택을 유도하는 마케팅은 효과가 없으며, 특히 모바일 시대에는 더욱 효용이 낮다고 지적했다.
그가 제시한 새로운 기준은 ‘절대가치’였다. 소비자는 이제 브랜드 이미지나 광고 문구 같은 간접 신호가 아니라, 실제 경험과 객관적 정보를 기반으로 판단한다. 리뷰, 데이터, 사용자 평가가 곧 선택을 이끄는 핵심 동력이 된 것이다. 절대가치는 대체 불가능하고 직접 경험으로만 확인되는 가치다. 반대로 ‘보편가치’는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일반적 가치다. 두 가치는 대립하지 않고 상호보완적이다. K콘텐츠는 절대가치를 확보하고, 그것이 보편가치로 확산되며 전 세계적 반향을 얻는다. 절대가치는 브랜드의 뼈대를 세우고, 보편가치는 이를 대중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
코어 팬덤의 마음을 훔치다
‘케데헌’은 원래 극장용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러나 제작 발표 4년 만에 정작 공개된 곳은 OTT인 넷플릭스였다. ‘케이팝’이란 표현 탓에 극장 측이 마니아 콘텐츠로 인식해 상영을 거부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작사 소니 픽처스가 IP를 넷플릭스에 양도했을 리 없다. 극장은 ‘케데헌’을 특정 팬층에만 어필하는 작품으로 본 것이다. 실제로 유명 아이돌 콘서트 실황 영화도 관객 동원력은 제한적이었다. 2018년 방탄소년단 월드투어 공연 실황을 담은 ‘러브 유어셀프 인 서울’은 고작 34만 2000명의 관객을 모았을 뿐이다. ‘케데헌’의 또다른 한 축인 오컬트 장르 역시 주로 젊은 세대에 국한된 마니아 영역이었다.

‘케데헌’도 처음에는 케이팝 팬을 겨냥한 마니아 애니메이션처럼 보였다. 응원봉, 팬덤 문화, 오컬트 요소는 코어 팬덤의 절대가치를 충족시켰다. 그러나 정교한 세계관, 청춘의 성장 서사, 한국적 문화 코드의 치밀한 고증은 보편적 울림을 만들어냈다. 주인공이 겪는 고민과 방황, 집단적 가치 속에서 성장하는 이야기는 전 세계 관객에게 긍정과 희망을 전달했다. 케이팝 팬덤이 아닌 이들도 ‘케데헌’을 오컬트 뮤지컬 애니메이션이라는 독창적 장르로 받아들였다.
케이팝 팬 너머 일반 소비자의 취향을 저격하다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케이팝 창작자가 참여했다는 명분을 넘어, 케이팝의 정체성과 세계관에 부합하는 동시에 대중적으로도 통할 수 있는 곡이었다. OST ‘골든’은 빌보드 핫100 1위를 차지하며 케이팝 팬이 아닌 일반 리스너들에게까지 도달했다. 핫 100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것은 K팝 팬을 너머 평범한 미국인들이 자동차를 운전하며 이 노래를 들었다는 의미다. 이 곡은 절대가치에서 출발해 보편가치로 확장된 대표 사례다. 영국 오피셜 차트에서도 ‘골든’은 93위 데뷔 후 1위까지 올랐고, 이후 2위로 내려갔다가 다시 1위로 복귀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는 단순히 코어 팬덤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절대가치와 보편가치는 한국적 요소의 고증에서도 드러났다. 떡볶이, 순대, 컵라면 같은 음식, 목욕탕과 한약방 같은 생활문화, 성곽길과 남산타워 같은 공간은 물론 단청, 일월오봉도, 무속적 상징까지 세밀히 구현됐다. 이러한 디테일은 한국 팬들에게 자부심을, 해외 팬들에게는 신선한 문화적 경험을 안겼다. 사소한 소품, 의상, 무기 디자인에도 한국 전통 문양이 녹아 있었고, 심지어 칼 이펙트에도 무속적 요소가 활용됐다. 결국 ‘케데헌’은 오컬트와 뮤지컬을 결합한 유일무이한 장르물이 되었고, 한국 전통문화를 세계인이 즐길 수 있는 보편적 가치로 변환시켰다.
이 과정에서 제작 주체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계 캐나다인과 미국인 제작진은 절대가치와 보편가치를 자연스럽게 믹스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한국적 디테일에 진심을 담으면서 동시에 글로벌 대중성과의 연결점을 찾았다. 이는 해외에 있는 한국계 크리에이터들이 소중한 자산임을 보여준다.
‘케데헌’이 브랜드에 전하는 시사점
‘케데헌’의 사례는 기업에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절대가치와 보편가치는 분리될 수 없다. 코어 팬덤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고, 라이트 팬덤만 추구하면 정체성이 사라진다. 결국 코어 팬덤을 만족시키는 절대가치가 먼저 구축돼야 하고, 그 힘이 라이트 팬덤과 보편가치로 확장된다.
브랜드 전략도 같다. 충성 고객인 코어 팬덤의 절대가치를 지키면서, 그 가치가 공명할 때 유입되는 라이트 팬덤에게는 보편적 언어로 다가가야 한다. K콘텐츠가 장르가 된 것은 절대가치와 보편가치의 공진화를 통해서다. 브랜드 역시 자신만의 절대가치를 기반으로 보편가치로 확장해야 한다. 단기 성과에 머무르지 않고, 장기적 설득력을 구축할 때 글로벌 시장에서 지속 가능한 성장이 가능하다.
김헌식 문화평론가
고려대에서 문화정책으로 박사 전공을 했고 건국대에서는 문화콘텐츠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대 후반부터 대중문화를 연구를 해왔으며, 중앙대학교 국가 정책연구소 선임 연구원, 동아방송예술대학교 초빙교수를 거쳐 지금은 중원대학교 사회문화대학 특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미래학회 연구학술 이사이며, 카이스트 미래세대 행복위원회, 과학기술정책 연구원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저서로 ‘김헌식의 K콘텐츠 혁명’, ‘새로운 트렌드가 온다’, ‘트렌드 클리닉’, ‘문화로 세상읽기’, ‘대중문화로 읽는 한국 사회’, ‘대중문화 심리 읽기’ 등이 있다.
외부 필자의 원고는 Cheil Magazine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