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은지 PD

연예인이 밥 먹여주냐?

연예인을 한 때라도 심하게(?) 앓듯이 좋아해 봤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말이다. 나 또한 팬으로 살며 이런 비난의 말을 최소 수십 차례 들으며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 ‘연예인이 밥 먹여주는’ 예능 PD로 10년 넘게 일하고 있다. 그리고 나처럼 힐난의 말을 듣고 자란 팬들은 이렇게 말한다. “연예인이 밥을 먹여주진 않지만 밥 먹을 힘을 줍니다.”라고.

실제로 팬들은 A를 입력했을 때 A라는 결괏값이 나오지 않음은 물론이고, 정확한 대가나 본전을 요구하지 않는 희한한 집단이다. 오히려 마음이 동한다면 작은 손해에 대해서도 항의하지 않고 본인들의 돈과 시간을 들여서라도 고 퀄리티의 결과물을 창작해 내기도 하는 무보수 열정 크리에이터 집단이다.

논리적인 이성보다는 감성에 움직인다는 점도 팬덤의 특이점이다. 이성과 달리 감성은 특정 요소에 따라서 몸집을 얼마든지 키울 수 있다. 누군가의 공감과 지지를 받으면 그 애틋한 감성은 더 배가된다. 그러나 냉철한 판단의 영역인 이성은 본질적으로 크게 달라지거나 그 세력이 좀처럼 커지기가 어렵다. 오히려 이성은 객관적인 반대 근거가 생기면 전원 꺼지듯 한순간에 힘을 잃기도 한다. 다행히 팬덤 기반의 마케팅은 감성의 영역이다. 누가 어떻게 터치하느냐에 따라서 엄청난 에너지원이자 열혈 홍보맨을 자처하는 브랜드 팬덤이라는 세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난제는 또 존재한다. 가성비와 본전에 민감한 MZ 세대 팬들은 개인의 시간과 비용을 들인 만큼 그에 상응하는 합당한 환경에서 팬 문화를 누리길 바란다. 그러나 이러한 팬의 본질적 심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팬덤 브랜딩을 할 때 흔히 많이 하는 실수가 있다. 스타를 사랑하는 팬이라면 ‘비판 없이 무조건’ 좋아할 거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실수다.

아쉽게도 지금의 팬들은 불합리한 상황에 절대 침묵하지 않는다. 예컨대 아이돌 팬미팅을 할 경우 팬과 아티스트가 가까이서 호흡하는 것이 핵심인 이벤트다. 그런데 행사장이 단차 없는 평지이거나 혹은 다른 이유로 일부 팬이 아티스트를 제대로 보기 힘들 경우 팬덤은 문제를 제기한다. 팬들 입장에선 아티스트의 팬미팅에 가는 근본적인 니즈인 탓이다.

반면 대표가 스스로 덕후임을 선언하고(덕밍아웃), 덕후의 진심을 담아 성공으로 이끈 브랜드도 있다. 바로 ‘욕실에서 즐기는 디저트’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화장품 브랜드 ‘휩드’다. 아이돌 팬덤은 아니지만 ‘코덕(코스메틱과 덕후의 합성어로 화장품, 화장법 등에 대해 많이 알고 매우 좋아하는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 또한 진심과 감성에 민감한 이들이다.

휩드의 대표 역시 평생을 ‘코덕’으로 살았다고 한다. 코덕답게 시중에 출시되는 거의 모든 브랜드의 클렌저를 구입해서 쓰다가 ‘질리는 시점’이 온 것이 휩드 출시의 시작이었다. 실제로 거의 모든 브랜드의 클렌저의 기능과 디자인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덕후들은 안다. 파고 또 파다가 ‘현타’가 오는 순간이 오게 됨을 말이다.

코덕은 이를 그냥 넘기지 않았다. 특히나 퇴근 후 하루를 마무리하며 가장 노곤할 때 쓰게 되는 대표적인 제품인 클렌저가 기쁨을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덕후의 진심을 담아 ‘조금 다른’ 클렌저를 만들어야 겠다고 결심한다. 이에 본인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인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매년 만들어주셨던 수제 케이크를 떠올렸고, 실제로 휘핑 크림 모양을 한 이 세상에 없던 디자인의 클렌저를 출시하기에 이르렀다.

덕후의 진심을 담아낸 제품은 큰 홍보 없이도 온, 오프라인의 젊은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아 휩드의 팬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더현대에 입점하자마자 매출 1위를 달성한 뒤 카카오톡 선물하기에도 입점했으며 높은 재구매율을 자랑한다고 한다. 스스로 화장품 덕후임을 밝히며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스토리텔링에 대중 또한 감성적으로 설득된 결과이다. 화장품 덕후인 본인의 권태 극복을 위해서라도 재밌는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는 덕후의 진정성. 그 진정성을 또 다른 덕후이자 요즘 시대의 소비자들이 밝은 눈과 귀를 열고 받아들여 준 것은 아닐까.

앞서 좋은 사례로 코덕을 소개했지만, 덕후의 마음이란 아이돌 팬덤 역시 동일하다. 작지만 근본적인 팬들의 마음을 챙기면 그들은 크게 반응한다. 예전에 ‘팬심 자랑 대회-주접이 풍년’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기획한 적이 있다. 나는 팬 프로그램을 런칭하는 PD이기에 앞서 ‘팬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으로서 팬들에게 잊지 못할 경험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례적으로 녹화장을 찾은 팬들에게 녹화장에서의 모든 사진 및 동영상 촬영을 허용했다.

실제로 내용 유출 방지 등으로 모든 방송 촬영장에서는 시큐리티까지 동원해 모든 종류의 촬영을 엄금하고 있다. 실제로 촬영 현장에서 이를 제지하는 중에 감정이 격해져 몸싸움이나 갈등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 정도로 방송사에서는 엄격하게 금하는 일이다. 이런 면에서 이런 나의 결정은 그간 없던 일이었고, 유출 방지는커녕 팬들의 스포일러마저 자유롭게 허락하는 일이었다.

사실 실제적으로 비용이 들어가는 일이 아니었지만, 이례적인 촬영 허용에 팬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실제로 녹화 이후에 각종 SNS에 방청 후기 등이 올라왔다. 세트장에서 자유롭게 즐기며 찍은 사진들을 또 다른 팬이 퍼 나르면서 부수적인 바이럴 마케팅은 물론 홍보에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애초에 파일럿으로 기획됐던 <주접이 풍년>은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되는 영광을 안았다.

큰 비결은 없었다. 팬들에게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쥐여주기보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 돌아오지 않은 소중한 순간을 기록하고 공유하게 해주었을 뿐이다. 이처럼 팬덤 마케팅을 시도하는 기획자들은 유형의 상품 개발보다 금액으로 치환 불가능하되 대체 또한 불가능한 경험을 주려는 심도 깊은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당신의 생각보다 어쩌면 팬들을 훨씬 더 세속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편은지 PD

KBS 예능 PD. SM 엔터테인먼트의 해외 마케팅팀 인턴을 시작으로, KBS 예능국 프로듀서로 입사해 본격적으로 팬과 함께하는 삶을 살기 시작해 팬들의 이야기를 담은 <팬심자랑대회-주접이 풍년>이라는 프로그램으로 PD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현재 <살림하는 남자들 2>의 메인 연출을 맡고 있다. 덕후 경험을 바탕으로 저서 ‘덕후가 브랜드에게’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