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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의 대표작 『삼총사』에는 ‘하나를 위한 모두, 모두를 위한 하나(All for One, One for All)’라는 구호가 나온다. 트랜스 미디어 시대, 브랜드 액티비즘의 성공을 위해서는 바로 이 구호가 필요하다.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는 소비자들의 크고 작은 스토리들이 잊히지 않고 거대한 공명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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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문화의 핵심을 담당해 온 브랜드에게 요구되는 역할이 최근 들어서 크게 변화하고 있다. 우리가 마케팅하는 유무형의 상징물인 브랜드가 우리 삶 곳곳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브랜드의 정체성을 소비자가 공감하도록 만들어 간다는 브랜딩의 근간은 여전하다.
하지만 이제 소비자는 브랜드가 일종의 ‘가상(virtual) 인격체’로서 브랜드의 가치와 목적을 소비자의 마음속에 표상하는 것을 넘어, ‘실제와 같은(real-like) 인격체’가 돼 각종 사회적 이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길 기대한다. 이런 현상이 바로 ‘브랜드 액티비즘(Brand Activism)’인데, 한마디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또는 환경적 개선을 통한 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만드는 브랜드의 노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물론 과거에도 브랜드의 사회적 기여에 대한 요구는 있어 왔고, 코즈 마케팅(Cause Marketing) 등을 통해 꾸준히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브랜드 액티비즘은 다르다. 마케팅 권위자인 필립 코틀러(Philip Kotler)와 크리스천 사카의 공저 『브랜드 액티비즘(Brand Activism: From Purpose to Action)』에 의하면 코즈 마케팅이 마케팅에서 시작해 사회로 나아갔다면, 브랜드 액티비즘은 사회에서 출발해 마케팅으로 나아간다. 브랜드 액티비즘에서 소비자는 단순히 브랜드 소비 주체인 고객(customer)이나 이해 관계자(stakeholder) 역할을 넘어 ‘브랜드 시민’으로 진화하게 된다.
브랜드 액티비즘을 세분화해 유형화하면 크게 6가지 영역으로 나뉘는데, 경영·정치·환경·경제·법·사회가 바로 그것이다. 예컨대 성평등이나 LGBT 관련 이슈라면 사회적 브랜드 액티비즘으로, 최소 임금이나 부의 분배에 대한 문제라면 경제 액티비즘으로 구분할 수 있다. 리바이스(Levi’s)의 브랜드 액티비즘은 사회적 액티비즘의 좋은 사례로 거론된다. 리바이스의 유럽 지역 브랜드 인게이지먼트 매니저인 로드리 에반스(Rhodri Evans)는 브랜드 액티비즘의 성공 요소로 청렴성, 독창성, 진정성, 용기라는 네 요소를 뽑았다. 이런 요소를 잘 충족시킨 캠페인이 바로 <리바이스 뮤직 프로젝트(Levis Music Project)>다.
리바이스는 음악가가 되고 싶어 하는 지역의 청년들에게 가능성을 열어 주는 특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2017년에는 미국의 래퍼이며 배우이자 유명 프로듀서인 스눕 독(Snoop Dogg)과 협업해 큰 호응을 얻었다. 청년의 꿈을 이룬다는 사회적 가치와 브랜드의 성격을 연결시키고, 음악이라는 독창적이면서 파급력 높은 영역을 선택함으로써 팬들의 자발적 참여와 브랜드의 진정성에 대한 공감을 얻어낸 것이다.
ⓒ Levi’s
▲ 리바이스의 <Levis Music Project x Snoop Dogg>.
최근 브랜드 액티비즘이 부상하는 이유는 우선 소비자 심리 및 행동의 변화에 기인한다. 과거의 브랜드는 기능적 가치 경쟁력과 외부인에 대한 소비자 자기 표현의 상징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답이 없는 시대라는 의미에서 ‘노(no)답의 시대라 불리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소비자들의 가치 추구 방향은 내부를 향하기 시작했다.
수년 전부터 유행처럼 번져온 ‘인문학과 고전의 부활’이나 ‘역사 엔터테인먼트의 산업화’는 이런 심리적 변화를 반영한 현상이다. 이처럼 소비자가 자신의 근본 가치(core value)에 대한 고민을 심화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그 고민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이 ‘의미 있는 브랜드 소유’인 것이다. 지금의 소비자는 때로는 가격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가격에는 무심한 채로 브랜드가 추구하는 철학을 기꺼이 구매한다. 코로나19와 같은 불가항력의 사태 때 정치·사회적 불안감, 장기적 세계 경제 침체, 세대를 관통하는 물질주의의 팽배 등 개인이 대적하기 힘든 사회 변화 속에서 소비자들이 자신의 무게중심을 잡으려는 노력이 소비자들 스스로를 근본으로 향하게 만드는 동인이 되고 있다.
또 다른 성장 요인은 바로 기업들의 변화다. 최근에 비영리 조직들은 그 양과 질적인 면에서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데, 그 성장세는 영리 기업을 뛰어넘을 정도다. 최근의 흐름을 보면 비영리 조직의 영리 활동 증가와 영리 기업의 비영리 활동 비중 증대가 함께 일어나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영리 기업의 사회적 참여가 한층 늘어나 이제 영리와 비영리의 구분이 모호할 정도이며, 소비자 또한 그 구분에 의미를 두지 않기 시작했다. 주식 시장의 반응도 기업의 경영 성과 지표 이상으로 기업의 철학과 스토리에 따라 변화할 정도다. 이제 기업 단위의 사회적 참여가 아니라 브랜드 단위에서 독립적인 사회적 참여가 요구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상징적 인격체이자 가치 전달자인 브랜드가 소비자에게 보다 직접적인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세계적인 투자자 워렌 버핏(Warren Edward Buffett)은 그의 자서전 『The Snowball』에서 복리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자본을 증가시키는 것은 눈사람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처음 눈덩이를 만들기는 힘들지만 일단 덩이가 형성되면 쉽고 빠르게 불어난다는 것이다.
브랜드 액티비즘도 유사하다. 소비자에게 느껴질 만큼 ‘덕을 쌓는 것’은 힘들고 가시적인 효과도 없어 보이지만, 종국에는 그 효과가 복리로 불어나면서 브랜드와 기업을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소비자는 미사여구와 아름다운 장식으로 빛나는 브랜드가 아니라 사회의 불의에 소리를 내며 또 행동하는 브랜드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미국프로풋볼리그(NFL) 쿼터백으로 경찰의 흑인 과잉 진압이 논란이 된 2016년, 국가(國歌) 제창을 거부하고 무릎을 꿇는 퍼포먼스를 시작한 인물인 콜린 키퍼닉(Colin Kaepernick)이 출연한 나이키의 2018년 광고 카피처럼 브랜드 역시 모든 것을 희생할지라도 때로는 뭔가를 믿어야 한다.
▲ 나이키가 ‘Just Do It’ 슬로건 30주년을 기념해 집행한 2018년 광고. © Nike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전문가인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 MIT대학 교수는 저서 『컨버전스 컬처(Convergence Culture)』에서 ‘참여적 문화’는 단지 기술적인 수준에 따라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의 손으로 직접 완성된다고 주장했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은 매체의 제약을 초월해 이야기 경험이 가공된 콘텐츠가 여러 가지 플랫폼과 형태로 전달되는 것을 의미한다.
소비자들의 사회적 참여 지향성이 높아지면서 소비자가 직접적으로 브랜드에 행사하는 영향력은 참여적 문화와 트랜스미디어 환경에서 더더욱 커지고 있다. 2020년 코로나19가 만든 비대면의 전면화는 이런 흐름을 보다 가속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브랜드 스토리의 수용자를 넘어 참여자로 부상한 소비자들은 직접 콘텐츠 크리에이터로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있으며, 비단 인플루언서가 아니라 하더라도 본인의 의견을 과감하게 콘텐츠로 표현하고 있다. 트랜스미디어와 참여적 문화가 성숙해진 지금 ‘통합 브랜드 커뮤니케이션(IBC: Integrated Brand Communication)’을 통해 소비자의 의견을 한 방향으로 흐르게 한다는 것은 교과서적 이상이 됐다.
이제 창발적으로 발생하는 소비자 의견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의견들을 한곳으로 모으기보다는 브랜드 철학을 행동으로 옮기고 소비자의 참여를 촉구하는 운동가(activist)로서의 접근을 취하는 것이 타당하다. 앞서 언급한 나이키 2018년 캠페인은 거센 반향을 일으켜 심지어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나이키 신발을 불태우는 운동이 일어나고, 대통령까지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는 등 강렬한 정서적인 반응이 있었지만, 반면에 수많은 지지자들을 열광적인 팬으로 만들어 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과 또 극단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을 인정하고 이런 큰 간극 속에서 나이키의 브랜드 정신(Just Do It)을 재정비하면서 브랜드의 본원적 의미와 가치를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트랜스미디어 시대에 브랜드는 ‘브랜드 스토리텔러’를 넘어 적극적인 ‘브랜드 스토리 메이커’로서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와 적극성이 요구된다.
1978년 창업한 벤앤제리스(Ben & Jerry’s)라는 아이스크림 브랜드는 사회적 가치와 공정 무역을 중시하는 기업으로 평등과 환경 보존 등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창업자인 벤 코헨(Ben Cohen)은 “우리는 가치들을 지향하는 회사이며, 브랜드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상업적 성공보다 가치 추구가 먼저임을 강조했다.
실제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인종주의를 반대하기 위해 2018년 ‘피칸 저항(Pecan Resist) 맛’ 제품을 출시하는 등 최고 권력자 앞에서도 행동을 주저하지 않았다. 2020년에는 미국 시민 단체들이 전개하고 있는 <이익을 위한 혐오 중단(Stop Hate for Profit)> 캠페인에 참여해 페이스북 및 인스타그램상의 유료 광고를 중단하기도 했다. 당시 노스페이스, 파타고니아, 캠핑 장비 업체 레이(REI) 등도 광고를 중단한 바 있다. 이 같은 벤앤제리스의 파격적 행보는 소셜미디어상에서 큰 논란과 함께 소비자 생성 콘텐츠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기도 했다.
▲ 벤앤제리스의 ‘피칸 저항’ 아이스크림 제품. ⓒ Ben & Jerry’s
트랜스미디어와 브랜드 액티비즘이 큰 조류로 등장한 시대, 광고 그리고 광고인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 광고는 크게 퍼포먼스 목표(performance goal) 광고와 브랜딩 목표(branding goal)광고로 구분된다. 흔히 퍼포먼스가 ‘과학적 측면의 광고’라면 브랜딩은 ‘예술적 측면의 광고’라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900년대 초 근대 광고가 시작된 이래 과학과 예술이 엎치락뒤치락하며 광고 산업을 이끌어 오다가 이제는 퍼포먼스를 지상 목표로 한 과학 선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클라이언트가 요청한 단기적 광고 성과에 대한 책무성의 압박 속에서 광고인은 숨 가쁘게 달리고 있다. 이런 단기적 광고 효과 그리고 퍼포먼스 마케팅의 한계는 대형 브랜드일수록 더 커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광고 어뷰징(ad abusing)이 늘어나면서 브랜드 안전(brand safety)에 대한 요구가 커질 정도로 강제로 만들어진 퍼포먼스에 대한 회의감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브랜드 액티비즘은 광고인에게 브랜드와 사회를 함께 성찰하길 요구하고 있다. 이런 성찰은 인공지능이 대신해 줄 수도 없고, 실시간에 이뤄질 수도 없다. 광고·마케팅 회사는 ‘광고의 본원적 가치’를 되돌아보고, 브랜드의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를 함께 조망할 수 있는 가치를 발견하고 성장시키는 전문가 집단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물론 광고인이 기술 기반의 새로운 도전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의 본질인 ‘브랜드의 목소리와 행동을 만들어 낸다’는 소명에도 충실해야 할 것이다.
*유승철은 이화여자대학교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이다. 미국 텍사스대학교에서 광고학을 전공한 후 제일기획에서 실무를 경험했으며, 이후 미국 로욜라대학교에서 디지털 전략 커뮤니케이션 교수를 역임했다. 디지털 소셜 콘텐츠 제작과 뉴미디어 활용 교육, 소비자 심리학 등이 주요 연구 분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