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정 청강문화산업대 웹소설창작전공 교수
4년 전, 넷플릭스에서 일어난 이상한 일. 한국 드라마 하나가 전 세계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영어 더빙도 없이, 자막으로만. ‘오징어 게임’이었다. 더 기묘한 건 그 후였다. 미국 아이들이 달고나를 만들어 먹고, 유럽 젊은이들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며 놀기 시작했다. 케이팝도 마찬가지다. BTS가 빌보드 1위를 차지했을 때, 팬들은 그냥 음악을 듣지 않았다. 뮤직비디오 속 나비와 꽃의 의미를 해석하고, 멤버들 간의 관계를 분석하고, 관련 소설(2차 창작이라고 한다)까지 썼다.
소비자는 이제 눈앞에 보이는 스토리를 너머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 그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가 살아가고 상처받으며, 누가 세상을 구하고 행복해지는지, 세계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규칙을 찾아내려 한다. K콘텐츠의 세계적 인기를 가능하게 한 ‘세계관’, 이 세계관은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떻게 만들어질까? 세계관 창작을 위해선 어떤 기술이 필요할까?
세계가 아닌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세계’관’
세계관이라고 하면 보통 판타지 소설의 마법 체계나 SF 영화의 미래적인 환경을 떠올린다. 하지만 세계관은 단순한 무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를 설명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관점. 그것이 바로 세계관이다. 흔히 좋은 세계관에는 일관성, 확장성, 참여성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는 스스로 세운 규칙을 배반하면 안 되고, 새로운 인물과 사건이 들어와도 작동해야 하며, 관객이 해석할 여지 역시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진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대체 세계관이 왜 필요한가?’ 왜 세계가 아니라, 세계‘관’이 필요한 걸까? 그 이유는 관점, 바꿔 말하면 세계 해석의 당위성. 즉 세계관이란 곧 작가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전달하려고 하는 하나의 메시지를 ‘작동하는 법칙’으로 바꾼 것이 세계관이다.

(출처: 넷플릭스)
산, 바다, 건물이 아닌 메시지로 만들어진 세상
창작물에서의 세계관이란, 의도가 있는 세상이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도 신의 뜻을 거스를 순 없다’, ‘합리적 이성이 수수께끼를 푼다’,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와 같은 메시지를 질서로 세워놓고, 그 플레이 규칙을 설계해 둔 시스템이다. 이러한 질서가 명확할수록 이야기는 당위성을 얻는다.
‘오징어 게임’을 보자. 이 작품에서 제작자가 말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비정한 세상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자가 진짜 승리한다.”는 가치다. 성기훈이 게임에서 이기고도 웃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돈은 얻었지만 정작 이 세계가 약속한 진짜 보상—인간으로서의 존엄—은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판 좀비로 유명한 ‘킹덤’은 어떨까? 좀비는 해외에서 더 전통적인 장르다. 수많은 좀비물을 두고 한국의 좀비물을 흥미롭게 본 이유는, 조선이라는 국가의 질서를 위협하는 은유로서의 좀비였기 때문이었다. 외척이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가로챌 때 조선 전체가 흔들리고, 쫓겨난 왕세자가 민생을 살피고 질서를 회복할 때 비로소 혼란이 물러난다. 외국 관객에겐 조선의 풍경이 낯설지만, 정당한 통치자가 나라를 구한다는 법칙은 익숙하다.
낯선 풍경 속 보편적 메시지
여기서 K콘텐츠의 흥미로운 지점이 드러난다. 한국의 풍경은 외국 관객에겐 마치 이 세계를 여행하는 듯한 낯섦을 준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법칙은 보편적이다. 한국 작품들이 다루는 주제—계급사회의 모순, 집단 내 위계와 갈등, 성공 욕망, 가족과 공동체의 끈, 세계의 부조리—등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보편적 감정이다. 거기에 한국 사회의 특수한 욕망이 더해져, 생생하게 낯선 ‘찐’ 현지의, 현장감 있는 이세계(異世界) 체험을 만들어낸다.
가령,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보자. 영화 속 반지하는 한국적 공간이지만, “보이지 않는 계급의 경계”라는 메시지는 어디서나 통한다. 이 보이지 않는 경계는 물리적으로 넘을 수 없기에, 결국 비극을 낳는다. 이는 전 세계 관객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느끼는 부조리함을 바탕으로 공감할 수 있으면서도 낯설고 모험적이며, 체험적이다.

(출처: JTBC)
그럼 어떻게 이런 세계관을 만들 수 있을까? 말했듯이 세계관은 그냥 멋진 무대가 아니다. 작가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단 하나의 핵심 질서로 현현된 설계 공간이다. 굳이 멋진 말일 필요도 없다.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돈이 있어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가 핵심 메시지라면 ‘재벌집 막내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곳에서 주인공에게 벌어지는 사건들은 주인공이 돈을 얻어낼 자격이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 마련된 시련들이다. 주인공이 규칙을 지켜서 시련을 통과하면 세계관의 질서를 획득할 수 있다. 이것이 세계관-플롯-인물의 긴밀한 삼각형이다.

결핍을 만들고, 해소법을 제안해라
이 삼각형을 좀 더 부연하자면, 주인공은 세계관의 핵심 메시지를 결핍한 인물이다. ‘오징어 게임’의 성기훈은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살 권리’를, ‘더 글로리’의 문동은은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에 대한 믿음’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우영우는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권리’를 결핍했다. 이 결핍이 바로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와 맞닿아 있다. 또한 그 결핍을 해소하는 과정이 곧 플롯이 된다. 주인공이 어떤 선택을 해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지, 잘못된 길로 가면 어떤 대가를 치르는 지가 그 세계를 움직이는 규칙이 된다.
BTS의 ‘방탄 세계관’도 이런 식이다. 일곱 소년은 각자 다른 상처를 안고 있다. 이들이 결핍한 건 사랑도 돈도 아니다. ‘서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을 찾아가는 과정이 뮤직비디오와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법칙이 된다. 팬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자신들 역시 같은 결핍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뉴진스의 ‘Y2K 감성’도 마찬가지다. 이건 단순한 복고 트렌드가 아니라 ‘꾸미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세계관이다. 요즘 10대들이 느끼는 ‘진정한 나다움’에 대한 갈망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BTS의 세계관을 담은 책 ‘BTS華(화양연화) THE NOTES’
모험을 떠나는 주인공
보통의 대중음악이 사랑, 욕망, 플렉스를 말한다면, K팝의 세계관은 어드벤처, 메시지, 질서, 가치를 담는다. 이곳의 아티스트는 단순히 가수가 아니라, 우리를 대신해 그 여정을 떠나는 영웅들이다. 최근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어떤가. 이들의 세계관은 낯선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적인 요소들을 디자인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영웅 서사다. 현대의 힙한 장르와 한국의 전통 신화가 뒤섞인 세계는, 외국 관객에겐 이질적인 규칙의 여행지이자, 동시에 보편적인 영웅 서사를 체험하는 공간이 된다.
세계관은 단순히 무대나 배경, 설정의 모음집이 아니다. 작가가 믿는 가치가 구체적 법칙으로 변환되어, 그 안에서 인물이 움직이고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이다. K콘텐츠는 (지금까지는)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넘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부조리와 결핍을 직시하고, 그에 대한 답을 찾는 거대한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여정에 동참하며 위안을 얻고, 스스로의 삶을 이해할 실마리를 찾는다. 이처럼 이야기가 우리 삶의 일부가 되는 순간, 그 힘은 국경과 언어를 넘어선다.
전혜정 청강문화산업대 웹소설창작전공 교수
스토리 작가이자 연구자, 청강문화산업대 웹소설창작전공 교수. 록음악과 장르물, 게임을 좋아하는 오타쿠다. 만화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고2때 미대 진학을 결심, 이화여대에 들어가 시각디자인 및 영상디자인을 전공했다. 내친 김에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나 막상 졸업 후 할 일이 없었다. 사업 구상을 핑계로 당당하게 놀아보고자, 개인사업자를 내고 본격적으로 스토리 창작을 시작했다. 단편 소설 데뷔로 시작한 일은 점점 규모가 커져서 특수영상 회사 빅아이의 콘텐츠기획 PD를 거쳐, 스토리텔링 회사 미디어피쉬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SF 단편영화 〈아톰팩스〉와 TV시리즈 애니메이션 〈로봇트레인〉의 제작 및 시나리오에 참여했으며, 중국과 태국으로 진출한 장편 웹툰 《세이브》 등 다수의 웹툰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이후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로 초빙돼 웹소설, 만화 스토리, 장르문학 등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웹소설창작과를 창과했다. 최근 저서 <살아남는 스토리는 무엇이 다른가>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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