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현 필사 커뮤니티 ‘인팩트’ 대표

책 속의 인상 깊은 문장을 정성스레 노트에 옮겨 적은 사진들이 인스타그램을 채우고 있다. 해시태그 ‘필사스타그램’은 이미 12만 건을 넘어섰으며, MZ세대는 자신이 필사한 문장, 각자만의 필사 방법까지 활발하게 공유하고 있다.

출판 시장의 변화도 눈여겨볼 만하다. 필사 관련 도서의 출간량이 해마다 꾸준히 증가하는 가운데, 시장의 요구에 맞춘 세분화가 두드러진다. 글쓰기 실력 향상을 위한 명작 필사 책부터 100일 목표 필사 책 등 목적과 장르별로 차별화된 도서들이 연이어 출간되고 있다. 단순한 유행을 넘어 하나의 지속적인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은 MZ세대의 필사 열풍.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불리는 MZ세대가 이처럼 아날로그적인 필사에 빠져든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MZ세대의 문해력 논란이 여러 차례 기사화되었다. 숏폼 콘텐츠에 익숙한 MZ세대는 긴 글을 읽거나 낯선 어휘를 마주할 때마다 난관에 부딪히곤 한다.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듯 성인을 대상으로 한 어휘력과 문해력 관련 도서가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는 자신의 언어 능력에 갈증을 느끼는 MZ세대의 고민을 여실히 보여준다.

뤼튼, ChatGPT 등 AI 글쓰기 도구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AI 도구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개인의 글쓰기 감각은 점점 무뎌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MZ세대가 주목한 대안이 바로 ‘필사’다. 필사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문해력을 키우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다. 좋은 문장을 손으로 직접 따라 쓰면서 자연스럽게 문장 구조를 익히고, 어휘의 쓰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키보드가 익숙한 시대에 손글씨로 문장을 써 내려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도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읽고 쓰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텍스트를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글쓰기 연습을 넘어 진정한 의미의 문해력 향상으로 이어진다.

휴대폰 사용을 일시적으로 제한하는 앱을 활용하거나, 각종 오프라인 모임에서 휴대폰 사용을 자제하는 문화를 만드는 등 ‘디지털 디톡스’를 실천하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이는 디지털 기기가 주는 과도한 자극과 피로감에 벗어나고자 하는 MZ세대의 갈망을 보여주며, 이러한 흐름 속에서 주목받는 것이 바로 ‘필사’다.

손으로 직접 글을 베껴 쓰는 필사는 단순히 글을 쓰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휴대폰과 늘 함께하는 MZ세대에게 필사는 잠시나마 디지털 세상에서 벗어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손으로 쓰는 명상’이 되어주고 있다. 키보드로 빠르게 입력하는 것이 아닌, 천천히 손으로 글자를 써 내려가는 과정을 통해 글의 의미를 곱씹고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필사하느냐도 MZ세대에게 중요한 자기표현의 수단이 된다. 소설, 시, 수필부터 비즈니스까지 필사하는 책의 종류는 곧 자신의 취향과 관심사를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이른바 ‘텍스트힙’이라 불리는 이 현상은 자신이 선택한 텍스트를 통해 개인의 취향과 감성을 표현하고, 이를 통해 문화 자본을 쌓아가는 MZ세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필사의 결과물을 공유하는 방식도 MZ세대의 특징을 반영한다. 단순히 완성된 필사 노트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필사를 본인의 일상과 연계된 콘텐츠로 공유한다. 타인과의 ‘관계’와 ‘공유’를 중시하는 MZ세대에게 필사는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고 타인과 교감하는 새로운 창구로 자리 잡았다.

필사 문화는 이제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으로 그 영역을 넓히고 있다. 독립 서점에서 열리는 필사 클래스부터 함께 필사하고 의견을 나누는 필사 커뮤니티까지 다양한 오프라인 활동이 생겨나고 있다. 이는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고 사람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즐기는 MZ세대의 특징이 필사 문화에서도 자연스럽게 반영된 결과다. 최근에는 공공 도서관에서도 필사 동아리를 운영하고 필사를 주제로 한 강연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등 필사 열풍이 공공 영역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필사 열풍은 디지털 시대에 오히려 아날로그적 가치를 추구하려는 MZ세대의 문화적 흐름을 보여준다. 빠른 속도와 효율을 추구하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도, 이들은 필사라는 전통적 방식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있다. 글씨로 한 글자 한 글자를 쓰는 필사를 통해, 우리는 잃어가던 생각의 깊이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필사가 일시적인 유행에 그치지 않고,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자기 탐구와 내면 성장의 수단으로 더욱 확산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미현 필사 커뮤니티 ‘인팩트’ 대표

2030 세대를 위한 온·오프라인 필사 모임을 이끌며, “사람을 통해 성장하고 배운다”는 슬로건 아래 깊이 있는 만남과 성찰의 장을 열고 있다. 농민신문사와 서울대학교 대학신문의 주목을 받으며 인터뷰이로 소개된 바 있으며, 현재 도봉문화정보도서관에서 필사의 가치를 전하는 강의를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