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진_바이야드 대표이사 /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벤처투자금융 MBA 부주임 교수

2009년 비트코인의 제네시스 블록(첫 번째 만들어진 블록)이 생성된 이래로 블록체인은 ‘신뢰 없는 신뢰(Trustless trust)’를 제공하며, 신뢰를 보증하거나 거래 결과를 책임지는 제3자 없이 개인간의 거래를 가능하게 하는 신뢰 머신(Trust machine)으로 작동해 왔다. 하지만 지난 2년여 동안 블록체인을 통해 다양한 NFT, 메타버스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DAO*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며 블록체인 거래의 양상 또한 변화를 맞고 있다.

*DAO (Decentralized Autonomous Organization)란 탈중앙자율조직이라 불리며 블록체인 토큰을 보유한 홀더들이 조직의 규칙을 제안하거나 의사결정에 참여하며 스마트컨트랙트에 의해 규칙이 실행되는 조직을 의미한다. 본래 프로토콜과 디파이 프로젝트에서 참여자들이 직접 운영에 참여하고 보상받아가는 효과적인 조직 운영의 툴로 활용되어 왔으나, 최근 단순한 금융 이익과 보상을 넘어서서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형식으로 각광받고 있다. 투명한 조직의 운영, 참여의 보장과 기여에 대한 투명한 보상 등이 특징으로 언론, 패션, 정치, 투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개인 간 거래에서 사회 참여 활동으로, 쓰임새 늘어나는 블록체인

프로젝트의 결과물로서, 또는 프로젝트의 가치를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하여 운영되는 커뮤니티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면서 블록체인상의 거래가 개인 간의 금융 거래(financial transaction)에 국한된 것이 아닌 소셜 트랜잭션(Social transaction)으로 확대되고 있다. 즉, 이전에는 개인들의 월렛 어카운트(블록체인 지갑 계정) 사이에 코인과 토큰의 거래가 트랜잭션 유형의 대부분이었다면, 이제 DAO 커뮤니티 내에서 홀더들이 정책을 제안하고 투표하는 등의 사회적인 참여 행위도 블록체인 트랜잭션의 주요 유형으로 떠오르고 있다.

문제는, 익명의 블록체인 월렛 어카운트로 존재하는 주체들이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면서 이른바 ‘신뢰’의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시빌 공격(Sybil attack)’이 있다. 시빌 공격은 본래 한 명의 개인이 블록체인의 익명성을 악용하여 여러 개의 노드를 운영하여 네트워크를 장악하는 시스템에 대한 보안 위협 중의 하나이다. 이를 프로젝트나 DAO 커뮤니티에 적용해보면, 하나의 개인이 여론이나 거버넌스를 장악하기에 충분한 수의 계정을 만들어 악의적(이기적) 목적으로 제안과 투표 시스템을 활용하는 사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블록체인 피해자 생기며 신뢰의 문제가 대두돼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주체에 대한 신뢰 문제, NFT를 발행하는 주체에 대한 신뢰 문제도 존재한다. 디지털 파일에 대한 저작권을 가지지 않는 익명의 주체들이 저작권자의 동의를 받지 않고 NFT를 발행하여 저작권자인 아티스트와 이를 모르고 구매한 투자자들 모두에게 피해를 입히는 사례라든지, NFT를 대량으로 판매한 뒤 개발자가 잠적해 버리는 이른바 러그풀 사례(rug pull, 양탄자를 잡아당겨 그 위에 있는 사람을 쓰러뜨린다는 뜻으로, 프로젝트 개발자가 프로젝트를 돌연 중단해 투자금을 가로채는 행위) 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미국 법무부가 급기야 러그풀에 대한 법적 단속을 공표하기도 하였다.

한 번 지갑에 들어오면 절대 옮길 수 없는 토큰

여기서 최근 이더리움의 창시자인 비탈릭 부테린이 흥미로운 제안을 담은 논문을 하나 출판하였다. 원제목은 ‘Decentralized Society: Finding Web3’s Soul(탈중앙화 사회 : Web 3.0의 영혼을 찾아서)’로, 여기서 비탈릭 부테린은 SBT(Soulbound token, 소울바운드 토큰)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SBT란 비탈릭 부테린이 즐겨하던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W)’ 내의 ‘소울바운드’라는 아이템에서 기인하였다. 게임 내의 보통 아이템은 누가 소유하든 사용이 가능하다. 게임 속 검을 친구에게 건네면 그 사람이 쓸 수 있는 식이다. 하지만 ‘소울바운드’는 최초에 그 아이템을 가진 아바타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영혼에 묶여 있다’는 뜻처럼 해당 아바타에게만 작동해 마치 아바타의 영혼과 같은 기능을 담당한다.

비탈릭 부테린은 논문에서 특정 지갑이나 어카운트 소유자의 사회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전송 불가능한 토큰의 개념을 제시했다. 여기서 사회적 정체성이란 타인에게 양도가 불가능한 소유자의 신원이나 경험치, 성과, 이력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전송이나 거래가 가능하지 않기에 발급되어 해당 지갑/어카운트에서 영원히 머물러야 하는 NFT, 그래서 한 번 발급되어 지갑에 담으면 그 지갑에 영원히 머물게 되는 NFT인 것이다.

아바타의 정체성이 되는 SBT(소울바운드 토큰)  

지금까지는 월렛에 단순히 ‘이전 가능한 금융자산’만을 담을 수 있었다면 SBT를 통해 이제 월렛에는 소유자의 다양한 사회적 정체성이 누적되게 된다. 그리고 이를 근간으로 우리는 커뮤니티 내에서 다시금 사회적 ‘신뢰’를 쌓아나갈 수 있다.

예컨대 환경보호를 주제로 활동하는 ‘에코’라는 이름의 NFT 아티스트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작업으로 벌어들인 수익 일부분을 환경 보호를 위해 쓰겠다고 이야기한다. 예술작품을 소유하면서 동시에 환경 보호에도 기여할 수 있는 매력적인 프로젝트이지만 이 익명의 아티스트가 정말 환경에 관심 있는지 단순히 환경 이슈를 마케팅 목적으로 활용하고 있는지 신뢰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만약 이때 아티스트의 월렛에 SBT의 형태로, 즉 이전 불가능한 NFT의 형태로 아티스트가 그간 참여해온 환경 보호 관련 이력이나 기부 활동이 쌓여 있다면 어떨까?

투자와 마케팅에 효율성 높이는 수단으로 활용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펀드를 DAO의 형태로 운영하는 투자자 커뮤니티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모든 월렛에게 동일하게 1표의 권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핀테크 스타트업을 평가할 때는 핀테크 기업에 대한 전문성이 있는, 농업 스타트업을 평가할 때는 농업에 대한 전문성이 있는 투자자들에게 좀 더 많은 권한을 주고자 한다. 이때 이들의 월렛에 소유자의 그간의 전문성을 확인할 수 있는 이력과 활동, 경험과 참여, 성과 등이 확인된다면 우리는 비록 익명의 대상들이지만 신뢰를 가지고 투자의사 결정과 관련하여 누구에게 더 많은 권한을 위임해야 하는지 선택할 수 있다.

NFT를 마케팅 툴이자 고객(팬) 커뮤니티 형성 목적으로 활용하는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SBT는 기업들도 주목해야 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마케팅 목적으로 활발히 활용 중인 에어드롭(특정 월렛에 무상으로 NFT나 토큰 등을 전송해주는 행위)에 있어서, 누구에게 혜택을 주어야 효용성이 극대화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많다. 이 상황에서 고객(팬)의 다른 커뮤니티에서의 행적, 우리 프로젝트 내에서의 참여 경력과 쌓인 평판 등을 SBT를 통해 확인하고 이를 에어드롭 대상자 선정에 활용한다면, 기여도가 높거나 잠재적으로 충성고객이 될 확률이 높은 홀더들에게 효과적으로 혜택을 부여하고 관계를 강화할 수 있다.

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은 선순환을 예상해 볼 수 있다.

SBT를 통해 소유자의 사회적 정체성이 월렛에 누적되면, 이를 바탕으로 익명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확보할 수 있고, 이런 신뢰를 기반으로 긍정적인 소셜 트랜잭션을 발생시킬 수 있다. 또 이러한 건강한 소셜 트랜잭션에 참여한 경험이 다시금 SBT로 발급되어 참여자 혹은 기여자의 월렛에 누적되며, 해당 월렛의 사회적 정체성을 더 강화한다.

사회적으로 ‘신뢰’가 낮은 경우 신뢰를 보완하기 위해 다른 비용이 커질 수밖에 없다. 블록체인 역시 ‘신뢰’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불거진다면 불필요한 비용의 발생이나 과도하고 비효율적인 규제를 불러들이게 될 수 있다. Web3 커뮤니티나 오픈 메타버스에서 벌어지는 소셜 트랜잭션에 있어, 블록체인이 익명성과 투명성이라는 특성을 잘 보존하면서도 ‘신뢰 머신’으로 기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는 이전 불가능한 NFT, SBT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박혜진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벤처투자금융 MBA 부주임 교수. Web3 관련 블록체인 기술 솔루션과 서비스를 개발하는 주식회사 바이야드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LG U+, 카카오엔터테인먼트, YG Plus 등의 주요 대기업의 Web3 프로젝트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콘텐츠진흥원, 한국조폐공사 등 정부 기관에 자문을 제공해 오고 있다. 동시에 서울과학종합대학원의 Venture Capital MBA에서 부주임 교수로 재직하며 스타트업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교육 및 자문을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