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월 23일. 데뷔 앨범인 <Genesis>가 약 20만 장 판매되며 9시 뉴스도 다룰 정도의 큰 이슈를 만든 가수가 탄생했다. 23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대한민국 최초의 사이버 가수 ‘아담’의 이야기다. 하지만 아담은 데뷔 당시 받았던 관심에 비해 오래 활동하지 못했고,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아담이라는 사이버 캐릭터를 구동하는 기술적 한계에서 찾았다.

한국 최초 사이버 가수 아담

이유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만약 아담이 5~10초 길이의 짧은 영상으로 이야기하거나 사진과 글을 통해 팬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TV라는 매체에 적응하지 못해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아담의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새로운 미래의 등장

미국의 릴 미켈라(Lil Miquela), 영국의 슈두(Shudu), 일본의 이마(Imma) 등 현재 버추얼 휴먼은 전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300만 명이 넘는 팔로워가 있는 릴 미켈라는 그녀만의 독창적인 세계관을 통해 팬들과 소통하고 있으며, 본인의 의류 브랜드 ‘CLUB 404’를 론칭하기도 했다. 거침없고 직설적인 성격으로 인종차별과 성 소수자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사회운동가로의 역할을 보여주며, 2018년 타임지가 선정한 ‘인터넷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25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버추얼 인플루언서 릴 미켈라 (출처: 릴 미켈라 인스타그램)

릴 미켈라를 비롯한 버추얼 휴먼의 활동 무대는 모두 SNS 등의 가상 세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가상 세계는 아담이 활동하던 시대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광범위해졌다. 버추얼 휴먼이 활동할 수 있는 주 무대가 확장된 것이다. 이는 버추얼 휴먼에게 단지 기술적 측면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버추얼 인플루언서 슈두 (출처: 슈두 인스타그램)

국내 첫 번째 버추얼 인플루언서의 탄생

2020년 12월 30일. 인스타그램으로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던 20대 여성이 피드에 기사 하나를 캡처해 올렸다. 본인이 버추얼 휴먼이라는 사실을 공개하는 내용이었다. 그녀와 소통하던 사람들은 놀라움과 신기함이 교차하는 댓글을 올렸고, 언론도 앞다투어 그녀의 이야기를 다루기 시작했다. 국내 첫 버추얼 인플루언서 ‘로지’는 그렇게 세상에 등장했다. 로지는 패션과 라이프스타일에 관심이 많은 동시에 자연을 경외하고 탐험을 즐기며 환경을 생각하는 20대로, SNS를 통해 많은 팬과 소통하고 있다.

국내 첫 버추얼 인플루언서 ‘로지’ (출처: 싸이더스 스튜디오 X)

주목만큼 많이 받았던 질문은 왜 로지가 처음부터 버추얼 휴먼이라는 것을 공개하지 않았는지였다. 싸이더스 스튜디오 X가 시작부터 큰 관심을 끌 수 있는 기술적 이슈를 숨기고 평범한 MZ세대 여성의 일상으로 접근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상 세계의 주류로 올라선 MZ세대는 참여와 소통의 문화를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세대다. ‘제당슈만(제가 당신을 슈퍼스타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라는 의미의 신조어)’을 외치며 자신들의 영향력으로 스타를 직접 만들고 싶어 하는 MZ세대에게, 로지는 처음부터 그들의 친구였어야 했기 때문이다.

버추얼 휴먼에 대한 새로운 시각

현재 버추얼 휴먼에 대한 평가 기준은 기술 영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는 버추얼 휴먼을 3D 데이터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한계를 만든다. 그 결과 버추얼 휴먼의 제작자에게는 리얼한 움직임이나 디테일한 표정의 표현에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의 투자가 요구된다.

버추얼 인플루언서 이마 (출처: 이마 인스타그램)

기술적 완성도는 분명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뛰어난 가창력과 출중한 외모만이 유명한 가수로의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음을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보여주었듯 말이다. 처음부터 로지가 버추얼 휴먼임을 공개했다면, 대중의 관심은 로지의 캐릭터가 아닌 기술에만 집중되었을지도 모른다. 로지에게 새로운 책을 추천하는 친구도, 멋진 카페를 소개하는 언니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작은 차이일 수 있지만, 이 시작은 로지와 MZ세대가 소통할 수 있게 했다. MZ세대는 로지에게 새로운 헤어 스타일을 추천하기도 하고, 팬들 사이에 로지의 남자친구가 될 새로운 남성 버추얼 휴먼의 이야기가 오가며 소통이 확장되기도 했다.

버추얼 모델 슈두와 로지의 콜라보레이션 (출처: 로지 인스타그램)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다

오늘날의 가상 세계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유명 기업이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생각이 또 다른 진화의 선도자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상상만 했거나, 또는 상상해본 적도 없는 새로움을 가상 세계라는 공간을 통해 일상에서 만나게 되었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진 가상 세계는, 버추얼 휴먼이 그 영향력을 확장하는데 최적의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버추얼 휴먼의 정해지지 않은 미래도 지금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미래는 결코,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김진수

광고학 석사. 광고대행사 JWT 애드벤처, 차이커뮤니케이션 등을 거쳐 현재 싸이더스 스튜디오 X의 총괄이사로 재직 중이다. 한국 최초의 버추얼 인플루언서 ‘로지’의 기획을 담당하였으며, <소셜 콘텐츠 마케팅 사례 연구> 등 다양한 연구 활동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