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선 일본 유자베이스 비즈니스 애널리스트

최근 한국의 성수동은 거리 전체가 미디어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브랜드를 경험할 수 있는 팝업 스토어가 즐비하다. 2030 세대의 최애 스팟으로 자리 잡은 ‘더현대 서울’ 또한 매장의 절반 정도를 판매 공간이 아닌 휴게 공간으로 만들기도 했다. 어느 새인가 소비자들은 물건을 사기 위해서가 아닌 체험하고 즐기기 위해 오프라인 점포로 몰려들고 있다. 오프라인 점포의 역할이 ‘판매’에서 ‘소통’과 ‘전시’로 바뀌는 양상은 비단 한국에 국한되지 않는다. 옆 나라 일본에서 역시 한국과 조금 다른 모습으로 ‘체험’에 중점을 둔 소위 ‘팔지 않는 가게’들이 등장하고 있다.

백화점 정장 매장에서 옷을 안 판다고?

‘팔지 않는 가게 (売らない店)’. 2018년쯤부터 등장한 이 용어를 어느새 일본 매체가 즐겨 사용하고 있다. ‘(물건을) 팔지 않는 가게’라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관심은 코로나 전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찾던 백화점 업계의 관심이 높았다. 당시 일본 백화점 총매출은 1991년 약 10조엔에서 2019년 약 5조 8천억엔으로 거의 반토막이 나 있던 상황이었다.

제품을 판매하지 않고 체험만 시키는 정장 브랜드 패브릭 도쿄의 매장 (출처 : 패브릭 도쿄 홈페이지)

마루이 백화점이 변화의 선두 주자인데, 2019년 매장의 10%를 물건 판매가 아닌 체험을 위한 매장으로 만들었고 그 비중을 점점 늘리고 있다. 예를 들어, ‘패브릭 도쿄(FABRIC TOKYO)’라는 맞춤형 정장 브랜드가 마루이 백화점에 입점하였는데, 이곳 매장에서는 옷을 살 수 없다. 오프라인 매장에서 고객은 치수를 재고 정장을 입어 본 후 제품을 원하면 온라인에서 구입할 수 있다. 마루이 백화점은 다른 백화점에서는 볼 수 없는 D2C(Direct to Consumer) 브랜드를 유치함으로써 고객들의 방문을 유도하며 D2C 브랜드에 장소를 임대하고 매장 운영 노하우를 제공하여 수익을 얻는다.

일본에서 확산 중인 ‘팔지 않는 가게’

체험과 전시를 주목적으로 하는 ‘팔지 않는 가게’에 기업들의 관심은 높아져 갔지만 실제로 이를 확산시킨 계기는 코로나였다. 한국에 비해 온라인 쇼핑 침투율이 낮았던 일본은 코로나를 계기로 온라인 쇼핑이 급성장하였고 판매를 위한 오프라인 매장 중 일부는 문을 닫았다. 클릭 한 번으로 원하는 물건이 다음 날 도착하는 시대에 오프라인 매장은 새로운 가치를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닥친 것이다.

이에 일본을 대표하는 백화점들은 속속 ‘팔지 않는 매장’을 선보였다. 소고 세이부 백화점이 만든 ‘츄스베이스 시부야(CHOOSEBASE SHIBUYA)’, 다이마루 백화점 4층 일각에 자리한 ‘아스미세(明日見世)’, 그리고 신주쿠 다카시마야 백화점 내의 ‘미츠 스토어(Meetz STORE)’ 등. 이들은 모두 코로나가 확산한 2020년 이후에 만들어진 공간이다.

테마별로 각종 브랜드의 제품을 모아 전시하는 소고 세이부 백화점의 코너 ‘츄스베이스 시부야’ (출처 : 정희선)

이들의 공통점은 물건을 판매하는 곳이 아니라 브랜드에 공간을 임대하고 제품을 전시한다는 점이다. 자사 매장을 가지지 않은 온라인 태생의 브랜드들이 일정 구획을 빌려 제품을 전시하고 소비자들은 제품을 체험한다. 백화점은 공간을 임대함으로써 새로운 수익원을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젊은 고객층을 백화점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기대한다. 오프라인 매장을 가지지 않은 중소 규모의 브랜드들은 자사의 제품을 홍보하는 장을 가지게 되며, 백화점을 방문하는 고객들 또한 새로운 브랜드를 만나는 즐거움을 가지게 된다.

판매가 아닌 고객의 데이터 수집을 노리다, 베타

일본을 대표하는 ‘팔지 않는 가게’ 중 하나는 베타(b8ta)다. 다양한 브랜드의 제품을 전시하는 베타의 가장 큰 특징은 점포 내 설치된 AI 카메라가 고객의 동선과 행동을 분석한다. 또한 베타의 스태프가 고객과의 대화 중 얻은 제품 관련 의견을 제조사에 전달한다. 베타에 출점한 제조사는 소비자에게 브랜드를 홍보하는 것에 더하여 타깃 고객을 이해하고 제품에 대한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최근 선보이는 일본의 ‘팔지 않는 가게’ 대부분이 베타와 비슷하게 ‘고객 행동 분석’이라는 기능을 넣고 있다. 2023년 2월, 매일 백만 명 이상이 이용하는 도쿄역에 식음료의 체험을 위한 쇼룸 ‘앤파운드 (&found)’가 기간 한정으로 오픈하였는데, 이곳에서도 카메라를 설치하고 점원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고객 데이터를 얻는다. 실제로 앤파운드는 상품의 홍보뿐만 아니라 마케팅 데이터 확보가 팝업 점포의 주요 목표라고 밝히고 있다.

카메라로 고객의 동선 등을 분석해 데이터를 수집하는 베타 시부야 (출처 : 정희선)

팔지 않는 가게, 저희가 만들어 드립니다

최근에는 ‘팔지 않는 가게’를 만들도록 도와주는 서비스까지 등장하고 있다. 베타는 베타의 판매 시스템, 분석 툴, 그리고 베타의 스태프를 제공하여 다른 소매업자가 자사의 매장에 쇼룸을 만들 수 있는 ‘바이 베타(by b8ta)’라는 서비스를 선보였다. 2023년 4월, 후쿠시마현 내의 자동차 판매점인 후쿠시마 닛산자동차의 약 300평에 달하는 대형 매장 중 40평을 전시 공간으로 만들었다.

가전제품과 타이어 등의 상품이 진열되어 있으며 방문객들이 정비나 상담을 기다리는 동안 상품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기존의 자동차 판매와 수리만으로는 수익이 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 새로운 비즈니스를 모색하던 중 자사의 공간을 ‘팔지 않는 매장’으로 만들어 임대 수익을 늘리고 소비자들이 모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한국에도 유명한 ‘츠타야 서점’을 운영하는 컬처 컨비니언스 클럽(CCC) 또한 최근 팝업 스토어의 출점 지원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서비스 이름은 ‘블록키조이팝(BlockyJOYPOP)’으로 현장에서 조립할 수 있는 박스형 부스를 브랜드에 대여하고 브랜드는 부스를 활용하여 팝업 스토어를 만든다. 팝업 부스를 설치할 수 있는 오피스나 상업시설 등의 공간을 섭외하는 역할까지 CCC가 진행한다. 가로 4.4 미터×세로 2.4 미터 크기의 박스 벽면과 부스 내 인테리어를 통해 브랜드 이미지와 세계관을 연출할 수 있다. 인공지능(AI) 카메라로 방문자 수와 체류 시간을 기록해 부스 내 고객 동향을 분석할 수 있는 서비스도 옵션으로 제공한다.

CCC가 지원하는 박스형 팝업 부스 (출처 : CCC 홈페이지)

이렇듯 최근 일본에서는 자사의 공간을 브랜드에 임대하여 브랜드가 소비자와 만나는 장을 만들고 임대 수익을 얻는 비즈니스 모델이 확산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오프라인 점포의 역할이 물건 판매가 아닌 공간 대여 및 브랜드 전시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점점 많은 공간이 데이터 분석이라는 기능을 넣기 시작한다. CCC 또한 팝업 출점 서비스를 시작한 이유를 첫째는 브랜드를 체험할 수 있는 접점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것, 둘째는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데이터를 마케팅에 활용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팔지 않는 가게’는 말 그대로 오프라인 점포에서 물건을 팔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팔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제 그들은 공간을 활용해 고객에겐 경험을, 브랜드에는 홍보와 고객 데이터 등을 팔기 시작했다. 우리가 쉽게 ‘매장’이라고 부르는 공간이 어떤 것들을 팔게 될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에도 관심을 가져보자.


정희선 일본 유자베이스 비즈니스 애널리스트

일본의 경제 미디어인 유자베이스(UZABASE)에서 비즈니스 애널리스트로 일하며, 한국에서도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도쿄 트렌드 인사이트> <도쿄 리테일 트렌드> 등 총 5권의 저서를 출간하였고, 동아비즈니스리뷰(DBR) 등에 트렌드 칼럼을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미국 Indiana University의 MBA 과정에서 마케팅을 전공하였으며, 우리 생활에 밀접한 소비재와 리테일 산업을 주로 분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