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

요즘 잘 못 듣는 말이 있다. ‘본방사수’, ‘생방’이라는 말이다. 누구보다 빠르게 방송프로그램의 새로운 회차를 볼 수 있지만 사람들은 그 장점보다 본방 · 생방이 가지는 불편함을 더 크게 느끼게 된 것이다. 첫 번째 불편함은 빨리감기가 안된다는 것이다.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최근 3개월 이내 유튜브, OTT 시청 경험이 있는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에서 69.9%가 영상을 빨리 감기로 본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Z세대의 경우 빨리 보기는 특이한 현상이 아닌 기본 영상 시청 방법에 가깝다.

시간을 내맘대로 쓰기 위해 비용 낼 의향 있어

‘유튜브 프리미엄’ 서비스를 이용하는 이유 역시 우리의 변화를 보여준다. 유튜브 프리미엄을 신청하면 광고를 건너뛰는 것뿐만 아니라, 스마트폰 화면을 꺼 놓고도 유튜브를 ‘들을 수 있다’. SNS · 쇼핑몰 등 여러 앱을 오가며, 또는 집안일을 하면서도 유튜브를 즐길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시간을 중첩해서 쓰는 능력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이것은 단순히 영상 시청 습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은 이제 시간을 내 입맛대로, 자유자재로 쓰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

해야 할 경험이 넘쳐나는 ‘경험경제’, 시간은 무엇보다 귀중한 자원이다

사람들이 시간을 압축하고 중첩하며 얻고자 하는 것은 ‘시간 대비 성과의 비율’, 즉 ‘시성비’를 높이는 것이다. 사람들의 시간을 아껴주는 온갖 기술이 발전하고 있음에도 역설적으로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영상 콘텐츠만이 아니라 외식 · 전시 · 공연 · 여행 등 경험이 넘쳐나는 ‘경험경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저축도 차용도 불가능한 시간 자원의 특성상, 하나의 경험에 시간을 쓴다는 것은 다른 수많은 경험은 포기해야 한다. 하나의 선택이 가진 기회비용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분과 초 단위로 시성비를 따지며 시간을 무엇보다 귀한 자원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러한 ‘분초사회’에서 우리는 소비자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시성비를 높이는 법: 시간을 단축하거나 촘촘하게 채우거나

소비자들의 시성비를 높여주기 위해 첫 번째로 고려해야 할 것은 소비자들이 관심 없는 것, 귀찮은 것, 소모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시간은 최대한 단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쇼핑몰에서 볼 수 있는 ‘품절 제외’ 옵션은 고객들이 성과 없는 곳에 시간을 들이지 않도록 미리 배려하는 기능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퀸잇과 같은 쇼핑몰은 추천 목록을 보여줄 때도 내 사이즈의 재고가 있는 옷만 추천받을 수 있도록 기능을 정교화했다.

내 사이즈 재고 있는 옷만 추천 상품으로 보여주는 온라인쇼핑몰 ‘퀸잇’ (출처 : 퀸잇 홈페이지)

반대로 틈새 시간을 활용하도록 도와주어 시성비를 높이는 방법도 있다. 짬PT, 틈새PT, 세미PT 등 30분에 맞추어 구성된 운동프로그램은 일반적인 PT의 절반 정도로 짧게 진행되지만 점심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싶은 직장인들의 욕구를 공략한다. 대기 시간을 활용하는 전략도 마찬가지이다. 신사동에 위치한 브런치 식당 ‘센티넬’은 입구에는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모니터를, 식당 곳곳에는 거울을 배치해 두었다. 착석하기 전이나 주문 후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고객들은 일행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틈새 시간을 공략하는 방법에는 의외로 큰 비용이 들지 않을 수 있다.

미리보기 사회: 실패없는 경험을 보장하기

소비자들이 시성비를 추구하면서 나타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실패 가능성을 극도로 피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방사수가 사라지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유튜브에서는 ‘무한도전’과 같이 오래된 예능프로그램이 꾸준히 사랑받는데, 재미있을지 알 수 없는 새로운 영상을 시도했다가 괜히 아까운 시간을 버리는 것보다는 이미 잘 알고 있어서 실패 할리 없는 콘텐츠를 보며 기분을 채우려는 것이다. 시청자들에게 미리 확신을 주는 것이 중요해지다 보니 최근에는 15분 길이의 영상 하나를 만들 때도 시작부분에 ‘하이라이트 장면 미리보기’를 넣는다. 러닝타임 두 시간짜리 영화에만 예고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경험에 맛보기가 필요한 ‘미리보기 사회’가 된 것이다.

과거 예능이 여전히 조회수를 끄는 트렌드에 맞춰 MBC가 만든 예능 아카이브 채널 (출처 : 올끌 유튜브 채널)

실패를 피하려는 성향은 소비 전반에 적용된다. 요즘에는 물건 하나를 구매하려 해도 수십개씩 리뷰를 참고한다. 심지어 넘쳐나는 리뷰 속에서도 의미 있는 정보를 선별하기 위해 낮은 평점 순으로 후기를 읽어 본다거나, 포토 후기 중에서도 필터가 입혀지지 않은 날 것의 사진을 골라보는 등 자신만의 전략을 구사한다. 많은 소비자들이 쿠팡을 사용하는 이유 역시 같은 맥락이다. 어떤 색깔이 괜찮을지 잘 모를 때 고민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여러 색을 주문한 후 쓰지 않을 제품은 무료 반품을 활용한다. 결국, 신생 브랜드, 신상품일수록 소비자에게 우리 브랜드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색상 고민에 시간 쓰지 않고, 여러 색 주문 후 원하는 색만 남기고 반품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시간 낭비 줄여주는 추천 기능

판매자의 추천과 제안도 확실한 선택을 위한 지름길이 된다. 일상 최대 고민거리, ‘뭐 먹을까’의 고민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는 곳은 배달앱일 것이다. 배달의 민족 앱에 등록된 메뉴의 개수는 2022년 말 기준 2,683만 개에 달한다고 한다. 끝없는 메뉴 속에서 스크롤만 오르내리며 시간을 보낸 적이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이때 누구보다 메뉴를 잘 아는 식당 사장님의 추천은 믿음직한 정보로 작용한다. 실제로 배달의 민족에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일반메뉴 대비 대표메뉴 · 추천메뉴를 선택하는 비율이 1.9배로 높았다. 대체재 · 경쟁상품이 많은 시장일수록 소비자에게 확신이 들게 하는 매력적인 제안이 중요하다.

이제는 가성비를 넘어, 시성비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자사의 브랜드, 제품을 바라보자. 소비자는 우리 브랜드를 통해 어떤 시간을 경험할까? 소비자의 시성비를 이해할 때 새로운 기회 영역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권정윤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의 공저자. 서울대학교 소비자학과 학·석·박사. <트렌드 코리아 2019>, <트렌드 코리아 2020>, <트렌드 코리아 2021>, <트렌드 코리아 2022>, <트렌드 코리아 2023>, <트렌드 코리아 2024>, <대한민국 외식업 트렌드 vol.1> 집필에 참여했다. 전자·식품·뷰티·통신·유통·여가 등 다양한 산업군의 기업과 소비트렌드 도출 작업을 함께했다. 현재는 성균관대학교에서 ‘소비자와 시장’ 과목을 강의하며 끊임없이 ‘소비자와 시장’과 관련한 새로운 주제를 탐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