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_Achim 디렉터

몇 달 전 이화여대 디자인 대학원에서 강연 요청을 받았다. <스몰 비즈니스 창업과 운영>이라는 수업이었는데, 스몰 브랜드를 운영하는 팀을 초대해 현업의 이야기와 경험을 나누는 자리였다. 얼마 전에는 Achim이 배송 상자를 만든 친환경 박스 제작 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제작을 문의하는 브랜드의 규모가 대부분 작은 편인데, 브랜딩 담당자가 따로 없어 도움을 줄 수 있냐는 연락이었다. 그때 실감했다. ‘스몰 브랜드가 주목받고 있긴 하는구나’

스몰 브랜드, 무엇을 기준으로 브랜드의 규모를 스몰, 미디엄, 라지로 구분해야 할까? 무엇이 작아야 스몰 브랜드란 말인가. 구성원의 숫자? 사무실이나 매장 등 소유한 공간의 크기? 매출이나 시장 규모? 아무리 생각해도 각각의 요소들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구성원이 많아도 순익은 마이너스일 수 있고, 구성원이 적어도 큰 이익을 내는 브랜드가 있다. 공간은 작지만 배달 주문이 끊이지 않는 가게도 있으며, 마켓 사이즈는 작아도 타깃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브랜드도 있다. 즉 보이는 것이 작다고 전부 스몰 브랜드라고 결론지을 수 없다는 말이다.

브랜드의 크기는 누군가 정해주는 것이 아닌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그 누구보다 내가 나를 가장 잘 안다. 남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이는 법. 이 관점에서 스몰 브랜드의 정의를 다시 한번 내려보면 스스로 성장의 속도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브랜드라고 말하고 싶다. 스몰 브랜드는 외부의 압박으로 인해 무자비하게 성장 악셀을 밟거나, 외형 매출을 키우기 위해 불합리한 결정을 하지 않고, 속도를 제어할 힘이 있다.

오히려 좋아, 스몰 브랜드

몇 달 전, 개인적으로 잘 사용하고 있는 일정 관리 앱인 ‘썬사마 (Sunsama)’의 오너, 아쉬토쉬 (Ashutosh)를 인터뷰했다. 썬사마는 글로벌 리드 투자사인 와이콤비네이( YCombinator)를 포함해 총 다섯 라운드를 돌아 약 21억의 투자를 받은 주목받는 스타트업이다. 10년 전 서비스를 론칭한 후 꾸준히 성장하며 서비스를 빌드업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이 서비스는 고작 여덟 명이 만든다. 게다가 모두 리모트 워크로 일한다. 올해 초 인터뷰 당시, 그는 가족들과 하와이로 이사해 6개월 된 아기를 키우며 새로운 곳에 막 정착한 때였다. 그에게 규모를 키우지 않고 계속해서 작은 팀을 유지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As a small team, we enjoy building the product and talking to users to understand their problems and improve things. If we were to raise a lot of money and hire more people, I would spend my whole day managing instead of doing what I enjoy most.”

작은 팀을 유지하며 일하는 일정 관리 앱 ‘썬사마 Sunsama’

(출처: 썬사마 공식 홈페이지)

작은 팀이기 때문에 재미있는 일을 누군가의 손에 맡기지 않고, 직접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것이 즐겁다고. 공감한다. 많은 사람을 고용하면 동시에 여러 일을 하며 속도를 낼 수 있겠지만, 프로덕트를 개발하고 개선하는 일에서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무언가를 생산하는 일에서 성취감을 얻는다면 결코 내려놓기 아쉬운 즐거움이다. 귀여운 팀 규모 덕분에 더 많은 이윤을 나누어 가질 수 있고, 금전적 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점도 언급했다. 스몰 브랜드의 장단점은 명확하다. 브랜드와 내가 합치되어, 모든 희로애락을 오롯이 누릴 수 있다는 점이다.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피드백 모두 내 몫이다. 누군가의 불편이 피부에 직접 와닿는다. 그냥 흘려보낼 수 없을 만큼 큰 책임감을 감당해야 하지만, 그만큼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며 살 수 있다. 거부할 수 없는 짜릿함과 보상이 존재한다.

스몰 브랜드는 어떻게 시작될까?

이제는 누구나 브랜드를 만들 수 있다. 불과 1, 2년 전만 해도 ‘나=브랜드’ 공식이 인기를 끌며 셀프 브랜딩에 대한 관심이 급상승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내향형 사람들은 얼마나 답답하고 어려웠을까 싶다. 내가 곧 브랜드가 되려면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제는 내가 최전선에 서지 않아도 브랜드를 만들 수 있다. ‘스몰 브랜드’가 되면 된다. 나의 것을 하고 싶지만, 브랜드를 운영하는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을 때, 브랜드를 앞세워 시장에 진출하는 스몰 브랜드가 많아지고 있다.

요즘 Achim에게 브랜드 아이덴티티 설계를 의뢰하는 팀의 규모만 봐도 그렇다. 대부분 작은 브랜드 사장님들이다. 어머님이 운영하시는 사과 농장에서 수확하는 사과를 지금까지는 농협에만 납품해 왔다면, 소비자를 직접 대면하고 판매하는 브랜드로 거듭나고자 하는 아드님도 있었고, 10년간 꾸준히 운영해 오던 내실 있는 작은 주얼리 브랜드가 리브랜딩을 고민하며 문을 두드리는 일도 있다.

소비자와 소통하는 브랜드로 거듭난 사과 브랜드 ‘어플러드’

(출처: 어플러드 공식 홈페이지)

그럼 스몰 브랜드는 어떻게 시작되는 것일까? 봉준호 감독이 수상소감에서 언급했던 스코세지 감독의 명언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라는 맥락처럼, 작은 브랜드일수록 아주 사적인 질문에서부터 출발하면 된다. 스몰 브랜드의 출발점은 결국 ‘나는 누군가?’에 대한 질문과 함께 시작한다. 차근차근 과거를 돌아보며 선택의 이유를 찾아보고, ‘나’는 어떤 가치관을 가졌는지 정리해 본다.

아무래도 정답이 없는 문제라 조금 괴로울 수 있지만, 이 단계를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치열한 물음을 통해 선명해지는 키워드를 잡고, 그 가치를 투영해 이름을 짓는다. 브랜드는 이름을 얻는 순간 실체를 입는다. 그때부터 이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생각해 보자. 사명과 미션을 정하고, 나만이 가진 장점, 즉 브랜드의 고유한 가치를 정리해 본다. 여기까지 되면 비로소 스몰 브랜드로서 세상에 진출할 준비를 마친 것이다. 시작이 튼튼하면 뿌리는 깊은 곳까지 내려간다. 비바람이 불어와도 덜 흔들리고, 성장의 속도와 규모를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스몰 브랜드의 생존법

마지막으로 스몰 브랜드의 건강한 생존법에 대한 고민을 나누며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하나. 귀를 열 되 동시에 귀를 닫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다른 곳에서 다 한다고, 우리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과 비슷하다. 이 학원이 유명하다고 꼭 그곳에 우리 아이를 보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곳에서 뛰어놀 때 가장 즐겁고 안전하고 자연스러운지, 스스로를 관찰하며 우리만의 놀이터를 찾아야 한다. 물론 브랜드를 만들어 가는 초반부터 이 땅이 내 땅인지 아닌지 알기는 어렵다. 그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직감(Gut Feeling)과 기록이다. 아이의 성장 일기를 쓰듯 어떤 어려움이 있고 어떤 성취가 있었는지 꾸준히 기록하자. 다음번에 비슷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게 폴짝 뛰어넘을 수 있다.

둘. 작지만 내실을 갖추자.

필요를 알면서도 작은 일이라고 그냥 넘어간다면, 그 어려움은 몇 배로 불어 돌아올 것이다. 작은 일들도 방치하지 말자. 눈앞에 보이는 휴지를 줍듯 차근차근 챙기자. 예를 들면 비용을 기록하고 계산서를 발급하는 일. 꼼꼼하게 택배를 보내고, 고객의 문의에 답변하는 일 등이다. 나는 분명 스몰 브랜드인데 할 일은 왜 이렇게 많은지 답답한 마음이 들고, 눈앞에서 달려 나가는 경쟁 브랜드를 보며 조바심이 날 수도 있지만 지치지 말자.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

셋. 함께 성장하자.

작은 브랜드를 운영하면 할수록 뼛속 깊이 깨닫게 된 것이 하나 있다면, 우리는 함께일 때 생존할 수 있다는 점이다. 팀을 꾸리는 것, 브랜드 간의 협업 모두에 해당하는 점이다. 브랜드를 혼자 운영하는 것은 좋지만, 혼자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말자. 그런 세상이란 없다. 인간의 능력은 유한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구분하고, 현명하고 겸손하게 다가가자. 한 명에서 두 명, 두 명에서 세 명일 때 쥘 수 있는 카드의 수가 달라진다. 이는 협업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브랜드와 브랜드의 만남은 늘 기대되면서도 귀찮은 일이다. 첫 만남부터 끝까지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도록 목적을 분명히 하고 예의를 갖추자. 나의 성공이 아닌 우리의 성공을 위해 일하자.

넷. 브랜드의 팬들과 내밀한 관계가 되자.

브랜드의 시작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소소하고 사소했을 것이다. 물론 스몰 브랜드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열의와 태도는 우주에 쏘아 올릴 우주선을 만드는 사람처럼 뜨겁고 사명감으로 가득할 테지만, 결국 날마다 하는 일은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를 만드는 일이다. 뜬구름 같은 이야기로 멋진 척하는 브랜드가 되기보다, 브랜드를 사랑해 주는 한 명 한 명과 내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친구 같은 브랜드가 되자. 마케팅 채널의 커뮤니케이션 톤앤매너도 선을 지키되 최대한 친절하게 설정하자. 어느 정도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였다면 가끔은 좀 더 솔직하고 대범하게 나의 고민과 이야기를 털어놓아도 좋다. Achim은 내밀한 관계 맺기를 위한 커뮤니케이션 채널로 뉴스레터를 활용하고 있다. 브랜드를 만들며 마주한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구독자분들에게 답을 구하기도 한다. 브랜드는 나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닌 팬들의 도움을 통해 조금씩 성장한다. 한 아이가 커가는데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는 고모, 이모, 삼촌, 이웃들에게 감사 표하자. 팬들과 한 가족이 되자. 이것이 훨씬 지속 가능한 브랜드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다.

뉴스레터를 통해 브랜드 팬들과 소통하고 있는 브랜드 아침(Achim)

(출처: 아침 공식 홈페이지)

며칠 전 출장길 비행기에서 브랜딩 전략가 최장순의 저서 <의미의 발견>을 읽었다. 책 말미에 이런 문장이 있다.

스토리는 전달하면 ‘스토리텔링’이 되지만 실천하면 ‘스토리 두잉’이 된다. 스토리 두잉이 있어야 스토리는 공유되고, 이 과정이 지속되면 기업의 실천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기업의 DNA로 뿌리내린다. 특별한 관계는 말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크건 작건 경험할 수 있는 액션 프로그램이 지속되어야 스토리는 사실이 된다.”

스몰 브랜드일수록 우리의 움직임이 작고 미비해,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길지 막막하게 느껴진다면, 처음 도전을 결심했던 시작을 돌아보자. 작지만 또렷하게 빛났던 그 순간. 그때의 마음과 이야기를 실천으로 옮겨 꾸준히 펼쳐 놓자. 보이는 것이 작아 스몰 브랜드가 아니라, 유연하고 민첩하게 움직이는 작은 브랜드로서의 장점을 최대한 누리며 앞으로 나아가자. 날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어도,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면 내가 꿈꾸던 스토리는 사실이 된다.


윤진

Achim을 만드는 사람. 콘텐츠, 브랜딩, 패션에 관련된 일과, 스타트업의 일하는 방식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7년간 패션 커머스의 에디터와 브랜드 마케터로 일했다. 그동안 취미처럼 만들어 오던 매거진 <Achim>은 회사에 다니며 얻은 배움과 관점 그리고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브랜드로 거듭났다. 이제는 콘텐츠에서 커뮤니티로 그리고 커머스로의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설계하고 스토리를 만드는 컨설팅 일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