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만드는 화법

광고 크리에이티브의 역할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컨셉을 깊게 고민해 고퀄리티의 결과물을 만들고 그 콘텐츠를 다양하게 활용하며 수익을 내던 시대가 끝나버렸습니다. 이제 크리에이티브의 역할은 데이터에 근거하여 촘촘히 새워진 미디어 플랜의 한 칸 한 칸을 잘 채우는 것이냐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변화는 글로벌 공통으로 보입니다. 아니, 글로벌 광고 업계는 이러한 시대의 요구를 오래전부터 더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수많은 거대 글로벌 에이전시들이 전통적인 광고 조직의 확장을 중단하고, 데이터에 근거해 예산을 투입하고 그 결과를 보장하는 퍼포먼스 마케팅 에이전시로 변신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비즈니스의 수익 모델을 완전히 바꿔가며 적응하고 있는 거죠.

콘텐츠를 제작하는 크리에이티브파트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글로벌 캠페인을 만드는 ECD의 입장에서 참 고민이 되었습니다. 크리에이티브는 더는 마케팅의 중심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데이터에 근거한 과학적인 접근은 결국 평준화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정답이 있다는 것은 모두가 정답을 맞출 수도 있다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그렇게 평준화된 어프로치를 다시 차별화시키는 것은 역시 크리에이티브일 것입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한 사람으로 그렇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미친 마케터 ‘라이언 레이놀즈’

요즘 제가 가장 주목하는 마케터가 있습니다. 라이언 레이놀즈.
마케터이자 크리에이터이며, 동시에 클라이언트이며 광고 모델이죠. 네, 맞습니다. 마블 영화 데드풀의 주연 배우, 라이언 레이놀즈입니다.


(출처: Dick Thomas Johnson from Tokyo, Japan, CC BY 2.0)

배우 라이언 레이놀즈는 영화 출연 외에 경영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에이비에이션 진’이라는 술 회사의 오너인데, 최근에 민트 모바일이라는 미국의 저가 통신사의 최대 주주가 되면서 통신사까지 소유하게 되었다. 라이언 레이놀즈의 유튜브 채널에 가면, 그의 개인적인 근황 외에 자신이 소유한 에이비에이션 진과 민트 모바일의 광고 영상들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영상을 하나하나를 볼 때마다, 이 시대에 잘 맞는 어프로치를 기발하게 구사하는 그를 보며, 정말 타고난 마케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노트북 스크린 쉐어와 웃긴 슬라이드쇼로 런칭

민트 모바일의 슬라이드쇼 영상은 천재적입니다. 자신이 민트 모바일의 오너가 되었다는 발표와 민트 모바일이 얼마나 저렴한지를 담은 이 영상은 역시나 레이놀즈 특유의 너스레로 시작합니다. 자신이 민트 모바일을 사고 나서, 엄청나게 멋진 광고를 찍고 있었는데, 몇 컷 찍고 팬데믹 상황이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촬영을 중단했다는 것이죠. 물론 직접적으로 코로나 혹은 COVID-19 라는 말을 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예상할 수 있습니다.


(출처: 라이언 레이놀즈 공식 유튜브 New ManageMint 영상)

엄청난 영상의 첫 부분이라는 세 컷은 떠오르는 태양, 울창한 숲, 울부짖는 호랑이인데, 그 컷들은 누가 봐도 대충 붙여 놓은 스탁 영상들입니다. 엄청난 영상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도 당연히 사실이 아닙니다. 중단된 촬영 대신 할 수 없이 슬라이드쇼를 이용해 프리젠테이션을 하겠다며 자신의 노트북 화면을 쉐어합니다. 프리젠테이션 파일을 제대로 찾지 못해서 노트북의 바탕 화면의 여러 폴더와 파일을 열어 보는데, 바탕화면엔 그와 관련된 유머러스한 제목의 파일과 폴더가 가득합니다. 예를 들어 아내인 블레이크 라이블리의 흑역사 사진 폴더가 있고 바로 옆엔 자신의 멋진 사진들이 놓였습니다. 적들의 이름 리스트 파일이라든가, 읽었다고 말할 책 리스트라든가.. 화면을 정지하고 하나하나 살펴봐도 좋을 정도로 재미있는 장치들을 심어 놓았습니다. 실제로 그 노트북이 내 앞에 있다면 모든 폴더를 다 열어보고 싶어집니다.


(출처: 라이언 레이놀즈 공식 유튜브 New ManageMint 영상)

프리젠테이션에 들어가면 더욱더 재미있는데, 일단 자사의 캐릭터인 민트 폭스를 디스하며 시작합니다. 소개하기는 하는데 사실 자기는 아직도 얘가 좋은지 모르겠다며 시큰둥합니다. 사실 제가 봐도 민트 폭스의 캐릭터 디자인은 매력이 없습니다. 그래도 자사의 캐릭터를 오너가 디스하다니, 레이놀즈니까 가능한 멘트죠.


(출처: 라이언 레이놀즈 공식 유튜브 New ManageMint 영상)

그다음 프리젠테이션 페이지부터는 프리젠테이션의 형식만 흉내 낼 뿐이고 실제 정보는 다른 통신사 대비 민트 모바일이 저렴하다는 내용밖에 없습니다. 막대그래프와 원형 그래프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말도 안 되는 내용들입니다. 예를 들어 막대그래프에는 다른 통신사 평균 가격보다 민트 모바일이 저렴하다고 얘기하면서 통신사 가격 그래프 옆에 느닷없이 스카이라이팅 (비행기로 하늘에 글씨를 쓰는 서비스) 가격을 함께 넣어 비교합니다. 원형 그래프 페이지에서는 갑자기 자신의 영화와 관련된 데이터 숫자를 보여줍니다.

전화기를 발명한 벨의 사진 옆에 ‘내가 살았다면 나는 민트 모바일을 썼을 것이다’라는 말도 안 되는 가정법 문장을 넣습니다. 프리젠테이션의 전형적인 기법인 유명인 인용 방식인데, 벨은 초상권 비용을 내지 않아도 되어서 등장시킨 것 뿐이라며 셀프디스도 해주죠. 별 내용도 없이 프리젠테이션은 마무리됩니다. 마지막으로 thank you 페이지를 45장이나 만들어 넣었고 귀여운 강아지 페이지도 넣었다면서 보너스 웃음을 주죠. 끝으로 영상 파일 하나를 클릭하자, 레이놀즈의 어머니가 등장해 네가 자랑스럽다고 말하고 레이놀즈는 당황하는 척 서둘러 슬라이드쇼 프리젠테이션을 끝냅니다.

이 능청스러운 프리젠테이션 영상을 다 보고 나면 기억에 남는 건 두 가지입니다. 라이언 레이놀즈가 민트 모바일의 오너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민트 모바일은 저렴하다는 것. 전달하고 싶은 내용을 정확히 전달한 것이죠. 더 중요한 건 영상을 다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스크린 쉐어한 노트북의 바탕화면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웃게 됩니다. 슬라이드쇼에 담긴 어처구니없는 팩트들도 다시 확인할 때마다 또 다른 재미를 줍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볼 때마다 새롭게 재미있는 요소들이 발견됩니다. 말하려는 메시지는 정확히 전달하고도 자발적으로 몇 번이나 영상을 다시 보게 만들다니, 정말 대단한 크리에이티브이며 놀라운 마케터입니다.

몇 십 만 원짜리 스톡 이미지로 싸게 만들었다고 자랑하는 광고

최근에 그가 올린 민트 모바일의 프로모션 광고 ‘A $500 ad’ 입니다. 영상이 시작되면 핸드폰 속의 라이언 레이놀즈가 말합니다. ’연말에는 거대 통신사들이 엄청난 광고비를 들여 광고를 만들지. 난 그런 데 돈 낭비하기 싫어서 그냥 몇십 만 원짜리 손 사진 이미지를 샀어. 그걸로 광고를 만들었지”.

실제로 화면엔 그가 나오는 핸드폰 이미지와 손 이미지, 그리고 프로모션 내용을 적은 자막 두 줄 뿐입니다. 그 외 화면은 온통 초록이죠. CG 작업을 위해 사용하는 그린 스크린을 대놓고 썼습니다. 라이언 레이놀즈는 능청스럽게 멘트를 이어가며 몇십만 원 주고 샀다는 그 손 사진만으로 프로모션 내용을 줌인으로 잘 보여주기도 하고 마지막엔 느낌표도 찍습니다. 이 영상을 제작하는 데는 그가 말하는 몇십만 원조차도 안 들었을 것 같습니다. ‘3달 가입하면, 3달 무료 사용추가’라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완벽하게 전달하는 것은 물론, 경쟁사인 다른 통신사를 한 방 먹이기까지 하죠. 이런 식의 심플한 자막 광고는 수없이 보아 왔습니다. 하지만 레이놀즈 광고의 매력은 일부러 대충 만든 유머입니다. 손 이미지의 정확한 가격을 말하며 자신이 구매한 손 이미지는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손 포즈까지 사용할 수 있다고 자랑합니다.

개 줄을 달고 출연한 에이비에이션 진 술병

레이놀즈는 에이비에이션 진 브랜드를 인수하여 오너가 된 이후에 다양한 마케팅 활동을 왕성하게 펼쳤습니다. 물론 그의 방식대로의 마케팅이었죠. 지금 소개할 영상은 그중 하나인 ‘Best in Show’입니다. 개와 주인이 함께 다양한 기술을 선보이는 도그쇼에 느닷없이 술병이 출전한다는 내용이죠.

몸을 푸는 레이놀즈의 모습으로 영상은 시작됩니다.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출발 직전의 그는 긴장한 것처럼 보입니다. 전형적인 도그쇼의 한 장면이고 심지어 고속찰영으로 괜히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잡습니다. 하지만 그가 누구입니까? 레이놀즈 아닙니까! 테이블 뒤에서 뛰어나온 것은 귀여운 강아지가 아니라 에이비에이션 진 술병. 능청스럽게 술병과 함께 달리기 하고, 목줄까지 찬 술병을 클로즈업도 해줍니다. 레이놀즈는 끝까지 진지한 표정으로 능청을 부립니다.

어떤 브랜드가 자신의 제품을 개 줄에 묶어 바닥에 끌고 다니길 원할까요? 우리는 그런 제안을 할 용기가 있을까요? 제안하면 받아들여질까요? 한참 웃다가 생각이 많아지는 영상입니다.

미친 섭외력, 미친 어프로치

라이언 레이놀즈의 유튜브 채널에 가보면 재미있는 영상들이 더 많습니다. 재미있는 마케팅 어프로치를 하기로 유명한 버진 애틀랜틱 항공사의 창립자 리처드 브랜슨과 레이놀즈가 나란히 앉아 주요한 발표를 하는 영상이 있습니다. 사실 실제 발표 내용은, 에이비에이션 진이 버진 애틀랜틱의 기내 서비스 주류에 포함되었다는 간단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레이놀즈는 몇 걸음 더 나아가 두 회사의 합병 얘기를 꺼내죠. 사전에 전혀 합의되지 않은 김칫국 발표에 버진 애틀랜틱의 브랜슨은 고개를 저으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습니다. 이분의 능청스러운 연기도 대단합니다. 그냥 기내 서비스에 포함되는 것뿐이라며 레이놀즈의 발표를 정정합니다.

레이놀즈는 비즈니스의 시작은 기내 서비스지만 결국 합병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우깁니다.  합병된 두 회사의 이름까지 생각해봤다며 제안합니다. 에이비에이션 진과 버진 애틀랜틱을 조합한 ‘에이비에이 버진 에이션’이 좋겠다며 로고까지 소개하죠. 결국 브랜슨은 욕을 하며 발표장소를 떠나버립니다.

어떤 술 브랜드가 항공사의 기내 주류 서비스에 포함된다는 내용을 이렇게 효과적으로 재미있게 알릴 수가 있을까요. 노골적으로 할 말은 다 전하는데 너무 재미있는 레이놀즈 특유의 방식이 돋보이는 영상입니다.

‘광고 안 보려고 유튜브 프리미엄을 쓰는데, 레이놀즈의 영상은 검색해서 봤어’

‘세 번째 돌려 보고 있어. 라이언은 당신은 대단해’

‘너무 웃겨서 모든 영상을 다 보고야 말았음’

레이놀즈 유튜브 채널 구독자의 댓글들입니다.

레이놀즈 마케팅 영상을 보면 퀄리티나 영상미 따위는 전혀 없습니다. 핸드폰으로 찍어 간단히 편집한 것 같은 영상이 대부분이죠. 그는 어떻게 이런 뜨거운 반응을 얻어내는 것일까요? 물론, 라이언 레이놀즈가 출연했으니까 가능한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셀러브리티를 브랜드 앰버서더로 활용하는 건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의 너무 흔한 일입니다. 만약 라이언 레이놀즈와 모델 계약을 맺은 클라이언트가 이 모델의 매력을 최대한 살려서 캠페인을 만들자고 할 때, 과연 우리는 이런 기발한 접근을 할 수 있을까요?  클라이언트는 그 아이디어를 받아줄까요? 매력적인 모델들을 활용한 수많은 광고 캠페인들과 라이언 레이놀즈의 캠페인 어프로치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요?

진지한 건 어색해, 수다가 좋아

레이놀즈식 접근의 핵심은 ‘수다’라고 생각됩니다. 그 특유의 빠른 멘트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어프로치는 욕망을 숨기지 않습니다. 친한 친구와 떠는 수다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제품을 팔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일로 바빠서 대충 만들었다고도 합니다. 속이 빤히 보이는 거짓말도 합니다. 허세도 부리고 안 되는 걸 된다고 우기기도 합니다. 일을 벌이고 수습이 안 되면 도망가면서 영상이 끝나기도 합니다.

최근의 과학적이고 마케팅 플랜은 그동안 메인이 되었던 근사하고 거대한 무대를 없애버리고 작은 방을 촘촘히 배치한 느낌입니다. 큰 무대에서 대단한 발표를 했던 과거의 캠페인은 하기 힘들어졌습니다. 새롭게 등장한 작은 방들은 아마 수다방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좀 창피한 이야기도 공유하고 솔직한 욕망도 꺼내 놓고. 잘못했으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자랑하고 싶은 건 체면 불구하고 거들먹거리기도 하고요. 오늘날의 콘텐츠는 가장 수다스러워야 하지 않을까? 아이디어가 막히면 라이언 레이놀즈의 채널을 살펴보세요. 똑같이 하기는 어렵지만, 소비자에게 친구로서 어느 선까지 수다를 떨 수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제일기획 이경주ECD

본 칼럼은 ‘한국광고총연합회 광고계동향 327호’에 게재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