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기획 정해윤 프로(콘텐츠비즈니스 4팀)

생성형 AI가 확산되면서 콘텐츠 제작 현장에서는 “AI로 한 번 만들어 보자”는 말이 익숙해졌다. 기업들도 AI를 단순한 제작 도구가 아니라 새로운 브랜드 경험을 만드는 방식으로 보기 시작했다. 구현하기 어려웠던 세계와 익숙한 제품을 다르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기대도 커졌다.
그러나 AI를 활용했다는 사실만으로 좋은 콘텐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왜 이 브랜드가 AI로 이야기해야 하는가’, ‘시청자는 무엇을 재미있어할 것인가’가 먼저였다. 삼성전기의 과제는 MLCC, 패키지기판, 카메라모듈처럼 보이지 않는 부품의 가치를 누구나 재미있게 볼 이야기로 바꾸는 것이었다.
첫 번째 우주가 이륙하지 못한 이유
처음에는 삼성전기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미래 도시를 영상으로 구현했다. 비주얼은 괜찮았지만 광고주가 기대한 스케일과 재미에는 미치지 못해 공개로 이어지지 못했다.
광고주가 원했던 AI 영상의 키워드는 우주, 외계인, UFO, SF 블록버스터, 의외성이었다. 광고주가 제시한 여러 레퍼런스를 분석해 보니 핵심은 영화 같은 스케일, 작은 위트, 브랜드와 제품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간 콘텐츠였다. 결국 광고주가 원한 것은 영화적 재미와 제품 메시지를 함께 담은 콘텐츠였다.
AI 영상일수록 스토리보드는 더 촘촘해야 했다

<삼성전기 AI 영상 초기 기획안>
우리가 제안한 시나리오는 우주 전쟁 중 멈춰 선 함선을 지구에서 직구한 삼성전기 부품으로 되살리는 이야기였다. 외계인들이 주문한 부품이 우주를 가로질러 함선을 구하고, 엔딩에서는 부품을 판매한 삼성전기 엔지니어의 눈동자가 푸르게 빛난다. 기술력이 우주로 뻗어간다는 메시지에 위트를 더한 설정이었다.
이번 제작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은 “AI 영상일수록 스토리보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실사 촬영은 현장과 편집에서 조정할 수 있지만, 생성형 AI는 한 장면만 바꿔도 캐릭터와 배경, 조명, 카메라 움직임, 앞뒤 컷의 연결까지 흔들린다. 그래서 표정과 대사, VFX, 컷 전환까지 스토리보드에 촘촘히 담았다. 덕분에 광고주도 결과물의 방향을 예측하며 수월하게 컨펌할 수 있었다.
전쟁을 지우자, 레이스가 시작됐다
인트로 일부가 구현됐을 무렵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생겼다. 국제 정세가 급변하면서 전쟁과 무기 이미지를 브랜드 콘텐츠에 사용하는 데 대한 우려가 커졌다. 이미 주요 캐릭터와 함선, 제품 장착 장면까지 완성돼 모든 것을 버릴 수도, 우려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기존 예산과 일정, 수정 비용, 브랜드 리스크를 함께 판단할 수 있도록 수정안을 제안했다. 논의 끝에 우주와 비행선, 캐릭터, 세 가지 제품, 우주 배송은 남기고 전투와 무기, 적군을 지웠다. 그 자리를 ‘마지막 랩에서 멈춘 선두 경주선의 역전 우승’이 채웠다.

<삼성전기 AI 영상 ‘갤럭시 그랑프리’ 컨셉 아트>
레이싱 전환은 제품의 역할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MLCC는 과부하를 안정시키고, 패키지기판은 신호와 전력을 다시 이으며, 카메라모듈은 경주선의 시야를 되살린다. ‘적의 격파’가 ‘성능으로 완성한 역전’으로 바뀌면서 삼성전기의 기술력을 더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됐다.
AI가 만들고, 사람이 기준을 세우다
영상이 기대 이상의 완성도로 구현되자 광고주의 반응도 좋았다. 그리고 온에어를 앞둔 마지막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IP 침해 가능성에 대한 검토였다.
역설적으로 완성도가 높아질수록 우려도 커졌다. 생성형 AI 제작물의 저작권 침해와 기존 작품 유사성을 둘러싼 분쟁이 잇따르던 시기였고, 대기업인 광고주에게는 실제 소송뿐 아니라 ‘법적 문제가 제기됐다’는 구설 자체도 피해야 할 리스크였다.

우리는 주요 프롬프트 발췌본 등 제작사로부터 확보 가능한 자료를 모두 받았다. 마블 등 특정 영화·캐릭터·브랜드명이 입력되지 않았는지, 캐릭터와 함선, 세트가 오리지널 레퍼런스를 바탕으로 디자인됐는지 확인했다. 제작사는 100개에 가까운 장면을 조사해 유사 가능성이 있는 부분을 수정했고, 인물과 캐릭터도 AI 유사성 검사 도구로 다시 살폈다.
자료와 자체 검토 결과를 바탕으로 법무팀과 함께 검토 논리를 보완하고, 광고주 미팅에서 제작 과정과 확인 결과를 설명했다. 우려가 해소되면서 마침내 온에어를 확정할 수 있었다.
0.001초의 승부, 그 이후

<갤럭시 그랑프리>는 2026년 7월 1일 공개돼 8일 만에 조회수 100만 회, 한 달여 만에 300만 회를 넘어섰다. “SF 영화인 줄 알았다”, “AI로 이런 퀄리티까지 가능하다니 몰입감이 좋다”는 반응도 이어졌다. 보이지 않는 부품을 다룬 영상이 한 편의 이야기로 시청자를 붙잡은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하나의 아이디어나 AI 툴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우리는 광고주의 제품과 브랜드를 이해하고 유튜브 문법을 적용하고, 크리에이티브를 발전시켰다. 서로 다른 전문성과 기준을 하나의 방향으로 모으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었다.
AI가 제작의 일부를 대신할수록 사람의 기획과 선택, 조율과 검수는 더 중요해진다. 영상 속 우주를 움직인 것은 삼성전기의 작은 부품 세 개였고, 그 영상을 완성한 것은 광고주와 제일기획, 제작사의 협업이었다. 현재 후속편과 인플루언서 파생 콘텐츠도 준비 중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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