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기획 강승리 프로 (황성필CD팀)
K의 시대
K라는 접두사는 언제 붙을까.
한국산 콘텐츠가 세계를 감동시킬 때 붙는다.
K팝·K드라마·K무비가 그 지위를 얻었고, K광고는 아직이다.

그렇다면 광고 앞에
K가 얼마나 가까이 왔는지 보여주는 지표가 있을까
한국팝이 빌보드 차트에 오르면서 K팝으로 성장했고
한국영화가 칸영화제 레드카펫에 서며 K무비로 자리 잡았듯
한국광고가 국제 광고제에서 거두는 성과가 K광고의 지표일 수 있다.
제작에 참여했던 국제광고제 수상작들을 돌아보며
광고 앞에 붙는 K값을 추정해 보려고 한다.
온에어가 끝나도 캠페인은 계속된다
2025년 5월 경찰청이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영상 하나를 올렸다.
제주경찰청 112상황실 요원이 받은 긴급 신고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통화연결음
상황실 요원) 긴급신고 112입니다
신고자) … (아무 말 없음)
상황실 요원) … 신고자분 위험한 상황이면 수화기 두 번 두드려보세요
신고자) … (두드리는 소리) ‘똑똑’
상황실 요원) 위치 추적하겠습니다
이후 경찰은 ‘최고 단계의 위험’을 뜻하는 ‘코드 제로(Code 0)’를 발령하고
즉시 현장으로 출동한 뒤 데이트폭력 피해자를 구출해 가족에게 인계했다.

이 신고 방식은 제일기획과 경찰청이 함께 만든 ‘말 없는 112 신고, 똑똑’으로, 2022년에 진행한 캠페인이 3년이 지난 시점에도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속 가능한 크리에이티브
‘말 없는 112 신고, 똑똑’은
가정폭력처럼 피해자가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 있어서
말로 신고하기 어려운 상황을 해결해주는 아이디어다.
112에 전화를 건 뒤 아무 버튼이나 똑똑 누르면
경찰이 말할 수 없는 상황의 구조 요청임을 인지한 후
신고자의 스마트폰 카메라로 현장을 보며 초동 대처를 한다.

‘똑똑’은 2023년 칸 라이언즈(Cannes Lions)에서 그랑프리(Grand Prix)를 수상했다.
심사위원장 티 어글로우(Tea Uglow)는 컨테이저스(Contagious)지와의 인터뷰에서
“일반적인 캠페인 사이클을 초월한 지속적인 임팩트가 있다”라고 심사평을 했다.
한국의 공식 112 신고 방식으로 인정받은 ‘똑똑’은 지금도 사람들을 구하고 있다.
삼성이 러그를 만든 까닭은?
첫 번째 키워드가 ‘지속 가능함’이라면 두 번째 키워드는 ‘예측 불가능함’이다.
국제광고제에서 주목한 한국광고들은 “이 브랜드가 이걸 했다고?”를 충족하는 경우가 많다.
냉장고, 세리프TV, 세탁기, 공기청정기, 로봇청소기는 신혼가전 5대장인데
‘장바구니’에서 ‘구매’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사이즈였다.
좁은 신혼집에 5대장이 들어가는지 보려면 각각의 가로×세로를 조사한 뒤
설치를 원하는 공간의 가로×세로와 비교해야 하는데 이게 은근히 까다롭다.
세리프TV, 공기청정기, 로봇청소기처럼 위치가 바뀌는 가전은 더 고려할 게 많고.

비스포크 러그(All You Need Is A Rug)는
5대장의 바닥 면적과 사이즈가 같은 러그를 만든 캠페인이다.
줄자가 없어도 러그만 깔면 원하는 공간에 원하는 가전이 들어가는지 알 수 있다.
테크 기업 삼성전자는 이 클래식한 러그로
2024년 뉴욕광고제(New York Festival)에서 동상(Bronze)을 받았다.

글로벌 광고회사 맥켄(McCann)의 CCO인 발레리 메이든(Valerie Madon)은
캠페인(Campaign)지와의 인터뷰에서
“심사위원을 미소 짓게 만드는 것은 최신 기술이 아닌 이런 심플한 아이디어”라며
내가 했더라면 좋았을 캠페인이에요, 우리 집에도 하나 두고 싶거든요”라고 했다.
이 꽃병에선 모든 꽃말이 안심
마지막 키워드는 ‘브랜드 효능감’이다.
우리가 보험의 효능감을 느끼는 순간은 사고가 나서 보상을 받았을 때이다.
그런데 사고가 나지 않은 일상에서 보험의 효능감을 느끼게 한 예가
삼성화재 파이어베이스(Firevase) 캠페인이다.
화재는 발생하면 엄청난 피해를 주기 때문에
초기 화재를 진압할 소화기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런데 2018년 캠페인 당시 국내 가구 중 58%는 소화기가 없었다.
있다 해도 어디 있는지 모르고, 어떻게 쓰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투척식 꽃병소화기 파이어베이스(Firevase)는
어디에 있고 어떻게 쓰는지 모를 수 없는 소화기다.
평소에 꽃병으로 쓰다가
화재 시 불 쪽으로 던지기만 하면
꽃병 속 소화용액이 산소를 차단해 불을 끈다.
2019년 칸 라이언즈(Cannes Lions)는 전략(Creative Strategy) 카테고리를 신설했다.
아이디어 이면의 아이디어를 보고, 컨슈머의 삶과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평가하는
이 카테고리에서 파이어베이스(Firevase)는 동상(Bronze)을 수상했다.


세상에 K 공식은 없다
지금까지 제일기획 동료들과 함께 만든 국제 광고제 수상작 세 개를
‘①지속 가능함 ②예측 불가능함 ③브랜드 효능감’으로 소개했다.
키워드별로 캠페인을 하나씩 다뤘지만
‘똑똑’과 ‘비스포크 러그’와 ‘파이어베이스’는
①②③을 모두 갖추고 있다.
물론 이는 개인적인 경험일 뿐이다.
K=①×②×③ 같은 공식은 당연히 없고
더 많은 분들의 생각과 관점이 모였으면 한다.

서두에서 K라는 접두사는
한국산 콘텐츠가 세계를 감동시킬 때 붙는다고 했는데
광고는 태생부터 불리한 측면이 있다.
사람들이 감동할 준비를 하고
음악을 듣고, 드라마와 영화를 보지만
광고는 스킵할 준비를 하고 보기 때문이다.
광고가 전달하는 감동의 수준이
다른 미디어보다 훨씬 높아야 한다는 뜻.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고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눈물과 웃음과 공감을 일궈왔다.
사무실 책상, 촬영장 구석, 편집실 소파 등
우리 주변 어딘가에 K가 서성이고 있을 것이다.
제일기획 강승리 프로
2013년부터 제일기획 카피라이터로 일하고 있다. 세계 최고 권위의 광고제 ‘칸 라이언즈'(Cannes Lions) 그랑프리를 포함해 국내외 광고제에서 120회 이상 수상했다. 2023년 삼성 디자인상을 받았으며, 아시아 지역 크리에이티브 전문지 ‘캠페인 브리프 아시아'(Campaign Brief Asia)가 발표한 2024 한국 최다 어워드 수상 크리에이티브(Korea’s Most Awarded Creatives 2024) 순위에서 공동 1위에 선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