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인_브랜딩 기획자

‘자, 이제 준비 운동은 끝났다. ESG는 트렌드를 넘어 본격적인 레이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우리도 ESG 하자!’ 각종 워싱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유행에 올라타고 싶어 하던 기업들이 슬슬 현실 속 어려움에 지쳐가고 있다. S(Social)나 G(Governance)는 어려워 보이니 E(Environment)를 먼저 건드려보려고 했지만, 2023년부터는 그것도 만만치 않아질 예정이다. 그린워싱에 대한 규제가 강력해지며 시정명령이 곳곳에서 내려지고 있다. 게다가 갈수록 S와 G에 대한 동시 이행 요구도 높아지고 있다. 불안한 금융의 시대에 끝이 보이지 않는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도 모자라 ESG까지 챙겨야 한다니, 주 80시간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다.

ESG 브랜딩 강연을 하면서 가장 많은 질문을 받은 것이 바로 ‘그래서 ESG 브랜딩을 어떻게 할 수 있나요?’이다. 창업하는 것이 아닌 경우에는 이제 와서 어디부터 ESG를 해야 하는지 더욱 곤란하다는 것이 공통된 상황이었다.

ESG를 위해 다시, 브랜딩

바다에 버려진 그물을 재활용해 모자 챙과 천으로 전환하는 브랜드 파타고니아

(출처: 파타고니아 공식 홈페이지)

브랜딩의 핵심은 정체성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통해 어떤 성과를 내는가, 라는 질문에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이고 간결하게 대답할 문장을 만드는 것부터 브랜딩 작업이 시작된다. 하는 일을 명확하게 설명하면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곳과 연결되어 있는지 그려진다. 회사가 실행할 수 있는 ESG의 기회는 이 ‘연결’에서 포착할 수 있다.

파타고니아는 아웃도어 활동을 중심으로 자연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 이후 재료에 대한 테크를 발전시키고 있다. 러쉬는 동물과의 연결을 시작으로 브랜드를 만들고 그 안에서 근로자의 가치를 조명한다. 아일린 피셔는 여성을 위한 옷을 만드는 것으로 창업해 환경 이슈를 끌어안고 나아가고 있다. 이들이 창업할 당시에는 ESG라는 단어가 없었다. 사업이 성장해 나가며 자연스럽게 정체성과 ESG 관련 접점이 생긴 것이고, 계속해서 일하다 보니 ESG 대표사례가 되었을 뿐이다.

ESG 관련 저널을 공유하고 있는 브랜드 아일린 피셔의 웹사이트

(출처: 아일린 피셔 공식 홈페이지)

구체적인 ESG 주제 잡기

우리금융은 국내 ESG 트렌드에서 한 발짝 뒤에 자리하고 있었던 기업이다. 모두가 애매하고 포괄적인 ESG를 향해 ‘일단 하자’는 태도로 달려갈 때 잠시 숨을 고르며 자신들만이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분야를 고민했을 것이다. ‘우리’라는 사명과도 연결되는 ‘포용금융’이라는 경영전략이 ESG 전략을 명확하게 만드는 데에 큰 역할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금융이 할 수 있는 역할 중 하나를 우선순위로 만들고 기업의 역할로 규명함으로써 다음 미션이 자연스럽게 파생되는 효과를 얻는 것이다.

우리금융은 지난해 아시아 기업 최초로 글로벌 생물다양성 이니셔티브인 PBAF(생물다양성 회계금융파트너십)에 가입해 관심을 받았는데, ‘생물다양성’이라는 굉장히 명확한 주제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 눈여겨볼 만하다. “자연에서 오는 손실이 기업의 손실로 이어지고 그것은 그대로 투자자의 손실로 이어진다”는 우리금융 손태승 회장의 인터뷰는 다분히 금융업을 기반으로 살아온 정체성을 가진 리더답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사업이 기본적으로 가진 속성과, 이 사업을 기반으로 나아가려는 구체적인 방향이 ESG의 주제 잡기와 그대로 연결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미국에서 개최된 CES 2023의 푸드테크 분야에 참여한 브랜드 널담

(출처: 널담 공식 홈페이지)

비건 디저트 생산으로 시작한 기업 조인앤조인의 브랜드 ‘널담’이 2023년 CES에 출품해 전 세계의 관심을 받았다는 소식이 무척 반갑다. ‘건강’과 ‘비건’을 연결하며 시작된 경기도의 이 작은 회사는 해마다 성장을 거듭하며 ‘푸드테크’라는 주제에 닿았다. 완성도 높은 비건 제품을 더 많은 사람에게 제공하기 위한 생산방식에 집중하며 만들어낸 결과다. 지난해부터는 비건 뉴트리션 연구소를 국내 최초로 설립해, 비건 뉴트리션 제품의 원료 연구 개발에 더욱 힘을 모아왔으며, 일해온 것들을 그대로 올 초 CES라는 세계 시장으로 들고 나갔을 뿐이다. 기업의 핵심 그대로가 브랜딩과 마케팅이 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다시 강조하면, 브랜딩의 핵심은 브랜드 그 자체다. 브랜드의 정체성이 이후 모든 성장을 결정한다. 브랜딩이나 마케팅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브랜드의 정체성으로 돌아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브랜딩을 잘한다는 것은 성장을 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장에 필요한 통증을 포함해서 말이다. 좋은 브랜딩은 브랜드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차근히 성장 과정을 밟도록 도와준다. 따라서 ESG 브랜딩은 좋은 브랜딩, 잘하는 브랜딩의 한 부분이다. ESG 브랜딩을 앞세워 브랜딩하려면 브랜드의 정체성으로 다시 한번 돌아가 볼 일이다. 우리 브랜드는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일, 강점, 주요 고객의 이야기 중 어떤 부분이 ESG와 연결되어 있는가? ESG 브랜딩은 브랜드의 정체성과 ESG라는 방대한 세계의 접점을 찾는 데에서 시작된다.


한지인

제일기획 스페이스 마케팅팀에서 첫 일을 시작하고 SPC, 이니스프리에서 브랜딩 업무를 수행했다. 이후 브랜딩 스튜디오와 에이전시에서 다양한 규모와 분야의 브랜드를 탄생시키면서 브랜딩 기획자이자 디자이너로 활동해 왔다. 프리워커로 브랜딩 프로젝트를 계속해나가고 있으며 2020년 <손을 잡는 브랜딩>, 2022년 <ESG 브랜딩 워크북>을 출간하고 브랜딩 관련 인사이트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