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화장품 정기구독 서비스 톤28)
구독은 오래전부터 우리의 생활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는 십여 년 전만 해도 신문과 우유를 구독했다. 매일 아침 대문 밑엔 신문이, 대문에 달린 주머니엔 우유가 있었다. 이 두 가지 구독 아이템은 슬며시 사라졌다. 유통 기술의 발전 때문이었다. 이제 콘텐츠는 랜선으로, 우유는 새벽배송으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기술의 발달은 또 다른 구독경제에 힘을 불어넣었다. 어도비, 마이크로소프트뿐만 아니라 수많은 소프트웨어 기업은 자사의 제품을 구독 형태의 서비스로 제공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글로벌 경제매체도 구독 모델을 도입했고, 국내에도 퍼블리, 아웃스탠딩 등이 구독 기반의 디지털 콘텐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출처: 맞춤영양제 정기구독 서비스 필리)
랜선을 넘어선 구독경제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소프트웨어와 디지털 콘텐츠는 구독 경제를 적용하기 가장 용이한 포맷이다. 서비스 제공이 인터넷만 연결되어 있다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구독경제는 랜선 너머로 나아가고 있다. 바로 오프라인과의 결합이다. 구독경제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비즈니스에 접목되고 있다.
가장 먼저 구독경제와 유기적 결합을 이룬 분야는 소비재다. 미국의 달러셰이브클럽과 우리나라의 와이즐리는 면도기와 면도날을 정기적으로 배송한다. 그동안 고객은 면도기 시장을 과점한 질레트의 면도기를 높은 가격에 소비했다. 면도기 구독 서비스 스타트업은 높은 퀄리티의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조달해 가성비 좋은 패키지를 구성했고, 이에 고객은 열광했다. 해피문데이는 생리대, 톤28은 기초 화장품, 필리는 영양제를 구독모델을 통해 고객에게 제공한다. 이들 제품의 공통된 문제점은 바로 비싼 가격이었는데, 기민한 스타트업들은 합리적인 제품을 개발한 뒤 구독모델을 접목해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만들어냈다.
(출처: 구글 네스트의 스마트 초인종 BIZION )
다양한 비즈니스 영역으로의 확장
큐레이션 구독 서비스도 부상하고 있다. 정보와 제품의 범람은 고객을 오히려 혼란스럽게 했다. 도무지 무엇을 선택해야 최선인지 알기 어려웠다. 고객은 소비자 편에 선 전문가의 선택을 존중했다. 꾸까는 아름다운 꽃다발을, 술담화는 미처 마셔보지 못했던 탁월한 전통주를, 오픈갤러리는 우리 집과 회사에 잘 어울리는 그림을 선택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들은 구독모델을 통해 고객이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한다.
구독경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연결되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구글은 다양한 커넥티드 홈 제품 사용자를 위한 네스트 어웨어(Nest Aware) 구독 서비스를 출시했다. 구글이 판매하는 초인종과 카메라 등을 구매한 뒤 구독 서비스에 가입하면, 사용자는 이 제품을 마치 보안을 위한 CCTV처럼 쓸 수 있다. 잔디깎기와 엔진톱을 만드는 스웨덴의 허스크바나(Husqvarna)는 장비를 앱에 등록한 뒤 관리할 수 있는 구독 서비스를 내놓았다. 소프트웨어 기업과 제조업 강자는 구독모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고 있다.
(출처: 면도용품 구독 서비스 와이즐리)
기업과 고객의 관계 변화
이 같은 변화의 흐름의 핵심은 무엇일까? 바로 기업과 고객의 관계 변화다. 전통 기업은 일대다(一對多)의 관계를 기반으로 했다. 즉, 기업은 자신들의 서비스와 제품을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판매해야 했으며, 기업은 고객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복잡한 유통경로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구독경제에서는 기업과 고객이 일대일(一對一)로 연결된다. 기업은 고객의 ID로 그가 누구인지 식별하고, 제품과 서비스의 사용 빈도와 만족도를 파악할 수 있다. 과거의 기업이 오랜 기간 R&D를 통해 제품과 서비스를 세상에 내놓은 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성공 여부를 가늠했다면, 구독경제를 무기로 든 기업은 무수한 A/B 테스트와 즉각적인 고객 반응 데이터를 통해 제품과 서비스의 지속적인 개선에 나서고 있다.
이들은 더 이상 신제품의 흥행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와이즐리는 고객 불만을 즉각 인식하고 면도기의 기능을 개선하며, 넷플릭스는 시청 데이터를 바탕으로 새롭게 투자할 콘텐츠의 성격을 결정할 수 있다. 아마존은 아마존프라임 구독 고객의 유입과 이탈을 실시간으로 관찰하며 지역별 물류 시설 투자의 비중을 결정할 수도 있다.
(출처: 꽃 정기구독 서비스 꾸까)
구독의 핵심은 기업에 대한 신뢰
고객과의 관계가 바뀐다는 것은 마케팅 전략이 변화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옷을 빼입고 식당 문 앞에 서서 고객의 손을 잡아끄는 대신 언제든 고객이 들고 날 수 있게 식당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 주방의 모습도 투명하게 공개하면 더 좋다. 유명 배우를 섭외해 고객을 현혹하는 후킹성 광고보단 기업의 진의(眞意)를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에 대해 더 고민할 필요가 있다.
구독은 ‘소비’보다 ‘향유’라는 단어로 더 잘 표현된다. 고객이 기업의 서비스와 제품을 향유하기 위해선 기업을 신뢰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성장할 것입니다.”라는 진실한 메시지는 고객이 구독자로 남아있게 하는 힘이다.
향후 몇 년 수많은 도전이 이뤄질 것이다. 작게는 귀걸이부터, 크게는 집까지 구독하는 서비스가 등장할 것이다. 이는 제품과 서비스가 소비되는 패턴 자체가 바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기업들은 화려한 일회성 광고와 소비자를 후킹(hooking)하는 마케팅이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와중에 구독모델을 포함한 새로운 유통방식을 고민하는 진취적인 기업은 고객의 발을 묶는 게 아닌 발이 머물게 하는 방안에 골몰할 것이다.
심두보
금융전문기자. 팍스넷뉴스 IB부 기자로 활동 중이다. M&A와 PEF, 벤처캐피털, 스타트업, 암호화폐 등에 대한 취재 경험을 쌓고 있다. <부자의 돈공부, 빈자의 돈공부>, <사이드 허슬러>의 저자다. 직장인 네트워크 프로젝트인 <회사밖>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