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연령의 고정관념을 깨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함을 증명하는 소비자들이 트렌디함의 새로운 기준으로 환영받는다. 젊은이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영상 촬영 기기나 액티비티 장비들을 구매하는 중장년층들이 증가하고, MZ세대는 1980~90년대 유행했던 레트로 아이템이나 아재 입맛을 찾아다닌다. ‘나이답게’보다 ‘나답게’를 외치는 에이지리스 소비의 세계를 탐구해 보자.
에이지리스 소비를 주도하는 소비자 집단 중 하나는 ‘오팔 세대’다. 오팔 세대의 등장은 대한민국의 나이 기준이 바뀌고 있다는 접을 시사한다. 이제까지 중년기는 생애 과업으로 주어진 자녀 양육과 부모 부양을 끝내고 나면 은퇴로 접어드는 것이 통념이었다. 60대 이후의 삶은 자녀의 부양을 받으면서 남은 생을 정리하는 조용한 시기로 생각됐다.
그러나 기대 수명이 연장되면서 퇴직 이후에도 건강하게 사회 활동을 지속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중년이라 부르기엔 이미 오랫동안 중년을 겪었고, 할아버지나 할머니라 하기엔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더 잘 어울리는 ‘신중년층’이 나타난 것이다.
이전까지 자신을 정의하던 사회적·직업적 역할에서 벗어나 흥미와 취향을 바탕으로 자아 실현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5060세대를 『트렌드 코리아 2020』에서는 ‘오팔 세대’ 라 명명한 바 있다. 오팔 세대의 ‘오팔’은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먼저 ‘OPAL’은 ‘Old People with Active Lives’의 약자로 2002년 일본에서 처음 소개됐으며, 고령화 사회의 주축으로 떠오른 액티브 시니어를 지칭한다.
또한 오팔은 베이비부머를 대표하는 ‘58년생 개띠’의 ‘58’과 발음이 같다. 무엇보다 보석의 한 종류인 오팔은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색을 보여주는 독특한 성질을 지니고 있어 예로부터 귀한 보석으로 대접받았다. 한마디로 오팔 세대는 다채로운 자신의 빛깔을 뽐내는 베이비붐 세대의 새로운 이름이다.
▲ 취미 생활을 즐기고 있는 액티브 시니어
이 세대는 새로운 기술이나 트렌드를 도전하고 배우는 데 적극적이다. 특히 모바일 검색이나 쇼핑에 능통하다. 코로나19 이전부터 모바일 쇼핑의 중요한 세대로 주목받았는데, 코로나19를 기점으로 온라인 쇼핑의 큰 손으로 부상하고 있다. 신선 식품 전문 배송업체 마켓컬리에 따르면 코로나가 발생한 2020년 1월 20일부터 5월 18일까지 50대, 60대 회원은 전년 동기간 대비 각각 112%, 122%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20~30대에 비해 주문 건수는 적지만, 구매력이 높기 때문에 매출에 미치는 영향력이 더 크다.
1인 가구나 젊은 엄마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HMR 시장에 최근 빠르게 진입하고 있는 소비자도 신중년층이다. 한돈 대표 브랜드 도드람이 30~50대 주부 1천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HMR 선호도 조사에 따르면 50대 전체 비율 중 55.5%가 HMR 제품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HMR 제품에 대한 향후 구매 빈도 예상 조사에서도 50대의 35.5%가 현재보다 자주 살 것이라고 답변하며 30~40대보다 적극적인 구매 의사를 밝혔다.
오팔 세대의 다음 세대인 X세대도 에이지리스 소비의 핵심 세대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 태어난 X세대는 각종 취미 활동이나 액티비티와 관련된 소비에 적극적이다. 온라인 쇼핑 사이트 G마켓에 따르면 3년 전에 비해 40~50대의 웨어러블 디바이스 소비가 33% 증가했으며, 헬리캠이나 드론의 경우 155%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SNS나 유튜브 등 콘텐츠 제작에 필요한 영상 촬영 용품의 구매량도 81% 늘어났다고 한다.
▲ 기성 세대는 젊은 층 못지않게 최신 전자기기에 대한 관심이 높다.
기성 세대의 소비 못지않게 MZ세대의 아재 소비도 주목할 만하다. 최근 2030 소비자들은 아재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등산에 빠졌다. 중장년층처럼 등산의 고수는 아니지만, 등린(등산+어린이)이들만의 등산 문화가 트렌디한 취미로 부상하고 있다. 칙칙한 등산복 대신 화려한 레깅스를 입고, 산 정상에서 찍는 SNS 인증샷과 비주얼 폭발하는 도시락은 필수다. 등산로 주변의 맛집 뽀개기도 빠질 수 없다.
▲ ‘등린이’들이 늘어나면서 아웃도어 브랜드들도 젊은 층의 취향에 맞는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 블랙야크 인스타그램 캡처(instagram.com/blackyak.official)
입맛과 패션도 바뀌고 있다. 마라, 흑당, 마카롱 등 단맛 일색이던 디저트 대신 심심하고 건강한 맛을 찾는다. 쑥, 흑임자, 자색고구마 등 전통 재료를 이용한 음료나 말랭이, 견과류 등 원물을 그대로 사용한 간식을 선호한다. 할머니의 맛을 즐기는 밀레니얼 세대라는 의미로 ‘할메니얼(할머니+밀레니얼)’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을 정도다.
▲ 흑임자, 단호박 등 밀레니얼 세대의 레트로 입맛을 겨냥한 제품들.
ⓒ 빙그레 인스타그램 캡처(instagram.com/binggraekorea)
최근 MZ세대 패션의 핵심 키워드도 1990년대다. 그 시대 유행했던 곱창밴드, 벨벳 머리띠, 멜빵바지 등이 인싸템으로 통한다. 취미도 나이의 고정관념을 벗어나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카세트 테이프, 턴테이블을 찾는 MZ세대들이 많아지는 추세다. G마켓의 조사에 의하면 10대~30대 소비자의 턴테이블, 오디오, 라디로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화폐·주화·우표 등 수집 용품 구매량 또한 3년 전 대비 50%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또한 할머니의 취미로 여겨졌던 손뜨개(크로셰), 비즈공예 등이 MZ세대의 새로운 취미로 각광받고 있다. 특히 코로나19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손으로 직접 자신만의 아이템을 만들고 인증하는 문화가 관찰된다.
연령은 이제 소비자를 가르는 핵심 기준이 아니다. 브랜드는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유연한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 일례로 2019년 코오롱스포츠는 70대 배우 김혜자 씨를 모델로 발탁하며 ‘도전하는 데 나이는 없다’는 메시지를 강조해 많은 MZ세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2020년 4월 출시된 신형 아반떼의 타깃은 나이가 아닌 ‘생각이 젊은’ 사람들이다. 아반떼 광고에는 ‘덕질’을 즐기는 노인 여성들, 육아 휴직하며 딸을 돌보는 아빠, 강아지를 새로운 가족으로 맞이하는 5인 가족, 교외의 국밥 맛집을 찾아다니는 젊은 커플 등이 등장한다.
▲ 77세의 여성 모델을 내세운 레깅스 브랜드 안다르.
젊은 브랜드가 되기 위해 젊은 타깃이 필요하다는 오래된 명제에 의문을 제기할 때가 됐다. 폭넓은 분야에서 에이지리스 소비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포인트는 나이를 뛰어넘는 브랜드의 열린 태도다.
*최지혜는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 분석센터 연구위원이다. 2014년부터 현재까지 『트렌드 코리아』 공저자로 참여하고 있으며, 소비자의 신제품 수용에 관한 행태 및 제품과 사용자 간 관계, 소비자 처분 행동에 관한 주제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