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성 브랜딩 디렉터·전략가

“나이키의 경쟁 상대는 닌텐도다.”

2000년대 초반 마케팅 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이 제목의 저서는 어느덧 마케팅의 고전이 되었다. 소비자의 지갑 점유율(Market Share)보다 시간 점유율(Time Share)이 중요하다는 통찰은 당시 수많은 마케터의 공감을 자아냈다. 그러나 오늘날 시간의 전쟁터는 닌텐도를 넘어 유튜브와 넷플릭스, 나아가 숏폼과 AI로 그 영토를 무한히 확장했다. 이제 브랜드들은 고객의 하루 24시간 중 단 몇 초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타임쉐어를 넘어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브랜드가 고객의 시간을 점유하는 데 성공했다 한들, 그것이 고객의 삶에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를 자문해야 한다. 도파민을 자극해 스크롤을 멈추게 하거나, 화려한 이벤트로 매장 체류 시간을 늘리는 ‘시간의 총량 싸움’은 이미 한계치에 다다랐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흘러가는 시간의 ‘양(Quantity)’이 아니라, 그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 즉 시간의 ‘질(Quality)’을 설계하는 브랜딩 전략이다.

시간의 질을 설계하는 첫 번째 단계는 고객이 머무는 물리적 시간을 브랜드 경험의 결정체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역설적이게도 ‘효율의 제거’에 있다. 효율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커머스 시장에서, 고객을 기분 좋게 방황하게 하거나 공간의 힘으로 압도하는 전략이다.

도산이나 성수에 위치한 ‘젠틀몬스터(Gentle Monster)’의 플래그십 스토어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공간을 통해 고객의 시간을 완전히 장악한다. 매장의 절반 이상을 판매와 무관한, 때로는 기괴할 정도로 아름다운 예술 작품에 할애한다. 고객은 이곳에서 제품을 훑고 지나가는 속도가 아닌, 낯선 감각을 즐기며 탐색하는 속도로 움직인다. 젠틀몬스터가 설계한 것은 세련된 아이웨어 이전에, 일상의 흐름을 끊고 공감각적 자극으로 시간을 꾹 압축해버리는 강렬한 몰입의 순간이다.

이 밀도 높은 경험은 고객의 기억 속에 젠틀몬스터라는 브랜드의 선명한 잔상을 남긴다. 짧지만 강렬한 이 시간은 단순한 소모가 아닌 ‘새로운 감각의 발견’으로 각인된다. 즉 단순히 물리적 시간을 늘리는 것이 아닌, 경험의 밀도를 높여 브랜드를 머릿속에 깊이 새겨 넣는 기술인 셈이다.

두 번째 전략은 고객이 느끼는 부정적인 시간(지루함, 기다림 등)을 브랜드만의 문법으로 재해석하여 가치 있는 경험으로 바꾸는 것이다. 즉, 시간의 흐름을 고객의 ‘성취’나 ‘기대’라는 방향으로 돌려놓는 설계다.

나이키(Nike)는 고객이 홀로 땀 흘리며 달리는 고독한 시간에 주목했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30분 이상의 시간을 ‘나이키 런 클럽(NRC)’이라는 디지털 생태계 안에서 기록하고 보상하며, 전 세계 러너들과 연결했다. 이제 나이키와 함께하는 러닝은 소모되는 에너지가 아니라, 자신의 성장을 증명하는 데이터이자 소중한 브랜드 자산이 된다. 고통의 시간을 성취의 시간으로 치환한 셈이다. 이는 나이키가 내놓은 나이키 트레이닝 클럽(NTC)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러한 치환의 미학은 럭셔리 브랜드 매장 앞 기다림에서도 극명히 드러난다. 이들에게 기다림은 서비스의 부재가 아니다. 오히려 소유를 향한 갈망을 기다림 속에서 천천히 숙성시키고, 브랜드의 가치를 온몸으로 체득할 준비를 하는 과정의 연장이다. 럭셔리 브랜드는 지루한 대기 시간을 열망의 시간으로 치환함으로써 제품 그 이상의 숭고한 가치를 획득한다. 고객에게 이 시간은 매장 앞에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곧 다가올 만남을 위해 기꺼이 ‘투자’하는 시간이 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단계의 전략은 반복되는 일상의 시간을 브랜드만의 의식(Ritual)으로 만들어, 고객의 삶 속에 브랜드만의 결을 새기는 것이다. 이는 일회성 몰입을 넘어 브랜드가 고객의 습관 속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과정이다.

이솝(Aesop)은 제품 판매를 넘어, 고객이 브랜드만의 감각과 마주하는 의도된 시간을 설계한다. 전 세계 어느 매장을 가도 이솝이 제공하는 시간은 늘 일정하다.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 느껴지는 특유의 아로마 향, 점원과 고객이 1:1로 나누는 정중한 상담, 정성껏 건네받는 따뜻한 티 한 잔, 그리고 세면대에서 직접 제품을 체험하며 손을 씻는 과정은 단순한 영업용 고객 응대가 아니다. 외부 세계와 단절하고 온전히 나와 브랜드의 감각에 집중하게 만드는 정교한 의식이다.

이솝은 효율적인 구매를 방해하는 듯한 이 느리고 정중한 과정을 통해 고객에게 ‘회복의 시간’을 선물한다. 매장에서의 이 짧은 리추얼은 매일 저녁 욕실에서 이솝의 제품을 사용하는 시간으로 이어진다. 일상의 평범한 행위가 브랜드와 교감하는 특별한 순간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브랜딩 전략을 고민할 때 이 ‘시간의 질’에 더 주목해야 한다. 우리 브랜드는 고객의 시간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단순히 빼앗으려 하는가, 아니면 무언가로 채워주려 하는가? 이제 브랜딩 디렉터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제품과 공간이라는 시각적 영역을 넘어, 고객의 시간 속에 ‘우리만의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결국 좋은 브랜드란 고객의 시간을 빼앗기보다 그 시간을 더 가치 있고 아름답게, 가장 브랜드다운 모습으로 만들어주는 브랜드다. 미래의 마케팅과 브랜딩은 단지 물건을 파는 기술이 아니다. 한 사람의 삶에서 가장 귀한 자원인 시간을 우리만의 형태와 결로 설계하는 ‘시간의 건축’이다.


전우성 브랜딩 디렉터·전략가

삼성전자와 네이버를 거쳐 29CM 브랜딩 디렉터로서 독창적인 감성과 강력한 팬덤을 지닌 브랜드를 구축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 스타일쉐어와 라운즈에서 브랜딩 총괄을 맡았으며, 현재는 브랜딩 전략 컨설팅사 시싸이드 시티를 이끌고 있다. 브랜딩을 단순한 마케팅을 넘어 고객과 만나는 모든 접점에서의 차별화된 경험이라 정의한다. 브랜드 정체성 정립부터 페르소나 정의, 콘텐츠 기획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직접 설계하고 있다. 저서로 《그래서 브랜딩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일》, 《핵심경험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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