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 작가_씨네21 에디터 및 <이제 우리 낭만을 이야기합시다>작가

내가 케이팝의 덕을 본 건 헝가리에서였다. 부다페스트로 여행을 갔다. 저녁밥을 먹고 공원을 산책하고 있는데 담배가 똑떨어졌다. 주변에는 편의점도 없었다. 노을이 막 지기 시작한 공원에는 많은 젊은이가 옹기종기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담배 냄새가 모락모락 나는 젊은이들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영어로 물었다. “혹시 담배 한 개비만 빌릴 수 있을까?”. 금연이 시대정신이 된 시대에 왜 담배 이야기부터 꺼내냐고 기분 상해하지는 마시라. 때는 2012년이었다. 당시 동유럽은 공원이든 길거리든 어디서나 자유롭게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 친구들은 영어를 할 줄 몰랐다. 도대체 이들에게 어떻게 환심을 사서 담배를 빌릴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한 친구가 어설프게 물었다. “아 유 차이니즈?”

그랬다. 아시아인이라면 온당 “아 유 차이니즈? 아 유 재패니즈?”라는 질문부터 듣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누구도 당신에게 “아 유 코리안?”이라고 묻지 않던 시절이었다. 나는 말했다. “아이 엠 코리안”. 그들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 자, 필살의 무기가 남았다. 나는 손목을 모아서 춤을 추며 “오빤 강남 스타일”이라고 노래했다. 그러자 자리에 앉아있던 몇몇이 일어나 싸이의 ‘강남 스타일’을 대충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로 친해진 그들에게서 의기양양하게 담배를 빌린 나는 약간 걱정에 사로잡혔다. 앞으로 50년간 외국을 여행하다가 “어디서 왔어?”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자연스럽게 “두 유 노 싸이? 강남 스타일?”이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겠구나.

넷플릭스 역대 히트작 1위를 차지한 ‘오징어 게임’ (출처: 넷플릭스)

그때만 해도 나는 K-콘텐츠가 지금처럼 전 지구적 대폭발을 일으켜 하나의 시대적 현상이 될 거라는 사실을 예상하지 못했다. 2000~2010년대에도 인기 있는 K-콘텐츠가 없었던 건 아니다. 박찬욱의 ‘올드보이’와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이 ‘웰메이드 한국 영화’ 시대를 열어젖히며 이미 한국 영화는 해외 영화광들에게 재발견됐다. ‘한류’의 시대도 무르익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지엽적인 현상이었다. 전자는 고급문화를 향유하는 서구 관객들에게, 후자는 아시아라는 지역에 한정된 현상이었다. 그러니 2012년의 내가 ‘강남 스타일’ 이상으로 전 세계적 현상이 되는 K-콘텐츠가 더는 나올 수 없을 거라 자신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은 영원히 ‘강남 스타일의 나라’가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나의 예상은 비참할 정도로 빗나갔다. 먼 훗날 21세기를 모두 담은 역사 책이 출간된다면 2020년대 챕터의 제목은 ‘K의 폭발’이 될 것이다. 소셜미디어와 유튜브라는 플랫폼을 바탕으로 BTS와 블랙핑크는 전 세계에서 가장 팬덤이 큰 그룹이 됐다. ‘기생충’의 봉준호와 ‘미나리’의 윤여정이 연이어 오스카를 받았다. 물론 가장 중요하게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사건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전무후무한 성공이다. 이 시리즈가 전 세계 1억 가구 시청률을 기록한 날, 콘텐츠 회사에서 일하는 친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이거는 국운인 거 같아. 한국의 시대가 왔나 봐.” 나도 동의했다. 지나치게 빠르게, 한국의 다양한 콘텐츠들이 전 세계에서 가장 쿨하고 힙한 상품이 되어버렸다. 이것을 단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정말이지 ‘국운’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K-콘텐츠가 전 지구적인 현상이 된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몇 가지 작은 단서들이 있다. 먼저 플랫폼의 힘이다. 유튜브라는 플랫폼이 K-팝의 세계 진출 교두보가 된 것처럼 2010년대 후반 새롭게 등장한 OTT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의 발판이 되기 시작했다. 한국 콘텐츠 제작자들은 더는 자신들의 영화와 드라마를 해외에 진출시키기 위해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 콘텐츠는 넷플릭스 같은 국제적 OTT 서비스에 올라가는 순간 수많은 국가의 시청자들에게 동시 공개된다. 팬데믹으로 OTT가 극장을 대체하는 시대가 생각보다 더 빨리 도달해버린 것도 K-콘텐츠에는 큰 도움이 됐다.

(좌) 한국 영화 최초 골든 글로브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 (출처: 연합뉴스)
(우)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 배우 (출처: 오스카 홈페이지)

OTT의 가장 거대한 시장인 미국 시청자들이 ‘자막으로 된 해외 콘텐츠’에 거부감을 버리게 된 것도 K-콘텐츠 현상의 중요한 단서 중 하나다. 2010년대부터 미국에는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할리우드는 소비자들로부터 타문화와 타민족에 예의를 더 갖추고 콘텐츠를 만들라는 요구를 받기 시작했다. 사실 대중문화에 있어서 미국처럼 열려 있으면서도 닫혀 있는 국가는 몇 없다. 미국인들은 오랫동안 영어로 된 미국 콘텐츠만을 소비하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다양성에 대한 논의와 함께 미국 콘텐츠 소비자들의 취향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넓어지기 시작했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으로 골든 글로브 외국어 영화상을 받으며 이렇게 말했다. “1인치 정도 되는 자막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은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겨우 2년 만에 미국 시청자들은 ‘오징어 게임’으로 1인치 자막의 장벽을 완전히 뛰어넘어 버렸다. 

재미있는 것은 ‘오징어 게임’이 처음 공개된 후 한국과 해외의 미묘한 시각차이다.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에 처음 업로드된 날 많은 (한국) 사람들은 불평했다. 일본의 데스 게임 장르와 한국적인 신파를 결합한 범작이라는 평가들이 소셜미디어에 줄을 이었다. 그 시점에는 누구도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의 지위를 획득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만약 당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면 나에게 꼭 알려 달라. K-콘텐츠 시장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중요한 인재로 내가 아는 회사들에 꼭 추천장을 쓰고 싶다!). 해외 시청자들은 달랐다. 압도적인 찬사가 쏟아졌다. 특히 깐깐한 한국 콘텐츠 소비자들이 한국적 신파가 지나치게 많다고 지적했던 ‘구슬치기 에피소드’를 해외 비평가와 시청자들은 진심으로 사랑했다. 한 영국 유튜버가 눈물 콧물을 흘리며 “이건 거의 셰익스피어 비극이네요!”라고 간증하는 동영상을 본 순간 나는 조금 미묘한 기분이 됐다. 우리가 ‘신파’라는 단어로 규정하고 거부하는 K-콘텐츠의 익숙한 특징 중 하나를 해외 시청자들은 “할리우드 영화보다 훨씬 더 깊이 있는 감정 묘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전 세계적 K-팝 열풍을 불러일으킨 ‘BTS’ (출처: BTS 홈페이지)

어쩌면 거기에 K-콘텐츠의 비밀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 한국은 진정한 21세기 문화의 용광로다. K-팝은 팝, 록, 힙합 등 장르의 경계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음악이다. 우리는 종종 SM이나 YG가 만드는 노래들을 장르의 한국적 혼성으로 받아들인다. 전혀 다른 노래 몇 개를 이어 붙인 것처럼 진행되는 에스파의 노래들을 생각해 보시라. 그 노래들은 문화적 페스티시(Pastiche: 혼성모방)다. 재미있게도 해외의 팬들은 그것을 K-팝의 매력으로 간주한다. ‘오징어 게임’에 대한 열광도 비슷한 데가 있다. 이건 완벽하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던 장르 영화들의 관습을 토대로 빚어 올린 콘텐츠다. 한국은 오래된 외국 대중문화의 관습을 받아들여 마구 해체하고 재조립하는데 능하다. 이제는 그 특유의 재조립 방식이 K-콘텐츠만의 고유한 정체성이자 ‘무언가 새로운 것’이 되는 것이다.

또한 ‘오징어 게임’에는 지난 20여 년간 해외 영화광들이 한국 영화에 매력을 느끼던 지점과 매우 비슷한 데가 있다. 한국 영화 창조자들은 자신의 작품이 ‘사회적 발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두려움이 없다. ‘기생충’이 자막의 경계를 뛰어넘은 건 매우 한국적이면서도 동시에 국제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격화되는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계급적 모순이다. 대부분의 영어권 매체들이 ‘오징어 게임’을 칭찬하며 자주 사용하는 단어도 ‘자본주의 비판’이다. 인정하자. 우리는 정치적이다. 한국인은 정치적이다. 우리는 대중문화에서 메시지를 전달하고 읽어내는 데 중독된 민족이다. 봉준호의 ‘기생충’도 정치적이고 윤제균의 ‘국제시장’도 정치적이다. 바로 그 지점이 한국 영화의 국제적인 성공을 가져왔다. 그래서 나에게 ‘오징어 게임’은 지난 한국 영화가 천천히 거둔 성공의 전략을 짧은 시간에 폭발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작품에 가깝게 느껴진다. 우리는 지금 20년간 뿌린 씨가 마침내 맺은 거대한 열매의 과육을 맛보고 있는 셈이다. 

K-콘텐츠는 ‘국제적인 성공’을 창조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국제적인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어져 버린 매우 흥미진진한 정점에 도달했다. 모두가 묻는다. 과연 이 성공이 계속될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60년대 홍콩 쇼브라더스 쿵푸 영화나 8~90년대 일본 팝 컬쳐의 국제적 유행을 예로 들며 이 현상이 영원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지금의 K-콘텐츠 붐이, 새로운 플랫폼의 등장으로 언어의 경계가 무너지고 전 세계 대중이 다양한 문화에 눈 뜨는 시대적 변화에 큰 수혜를 입은 현상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모두가 미래를 내다보는 점쟁이처럼 굴고 있지만,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어쨌거나 ‘K의 폭발’은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더 없는 행운이라는 사실이다. 더 이상 “두 유 노 강남 스타일?”이라는 말로 당신을 인증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행운이 아니라면, 나는 뭐가 진정한 행운인지 잘 모르겠다.


김도훈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 영화를 비롯한 많은 문화 콘텐츠에 대해 다양한 글을 쓰고 이야기하며 현재는 유튜브 채널 <무비건조>에 출연 중이다. 저서로는 에세이집 <이제 우리 낭만을 이야기합시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