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기획 박상준 프로 (제작본부)

1. 위기일발 장전

위기의 연속이었던 모 프로젝트를 겨우 마치고 찾아온 잠깐의 평화. 이런 류의 평화는 결코 길지 않다는 광고계 속설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연락이 찾아온다. “프로님 광고인의 위기탈출 NO.1 이라는 주제로 글을 좀 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이 빠진 걸 어떻게 알았지? 바쁜 척 잘했는데… 역시 회사는 나보다 한 수 위인가?’라는 생각에 잠시, 절체 절명의 ‘위기’ 혹은 글로벌 경제 ‘위기’처럼 위기라는 단어를 쓸만한 긴박한 순간이 있었나라는 생각에 또 잠시, 그리고 무엇보다 위기의 NO.1이라면 몰라도 탈출의 NO.1이라는 타이틀에 나는 걸맞는가?라는 생각에 꽤 오래 머뭇거렸다.

‘알겠습니다’라고 답을 하는데 꼬박 주말을 소비했다 (*주말 내내 아무 생각 없이 놀았다는 뜻이다) 글을 쓰기로 결정하고 나서 며칠은 나에게 찾아왔던 위기(라고 부를  만한)순간들을 기억해 내는 데 썼다. 다시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지는 순간도 있지만 대부분은 ‘맞아 그랬었지’ 낄낄대며 떠올렸던 그날의 기억들. 물론 그 당시엔 분명 질렸거나 지렸거나 둘 중 하나는 했을 법한 위기의 기억을 소개해 본다.

2. 누가 위기를 기회라 말했는가?

찍어야 할 컷은 많고 시간은 없기에 새벽부터 강행군이 예정된 모 브랜드의 촬영 날. 아이디어를 팔기까지 힘들었으니 이제 순조롭게 촬영만 하면 된다고 우리는 웃으며 서로를 격려했다. ‘회사에 모여서 출발하면 일찍 일어나서 나와야 하잖아? 1시간 더 자고 차를 가지고 가면 하루의 시작이 얼마나 상쾌하겠어?’ 전날 CD님께 따로 출발하겠다고 선언하고, 기분 좋게 일어난 나는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내는 여유까지 부리며 평화롭게 촬영장에 도착했다. 순조로운 촬영 준비에 작은 행복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촬영 시작 30분 전, 등 뒤가 싸늘하다. 피디님의 비수가 날아와 귓가에 꽂혔다. “제작팀이 타고 오신 승합차 기사님의 가족이 확진이랍니다.” 그 즉시 촬영을 진행해야 하는 담당 CD를 비롯한 제작팀 전원은 방역 기준에 의거 촬영장에서 철수했다. 한 시간을 더 자고 쾌조의 컨디션을 자랑하던 카피라이터 한 명을 빼고는. “상준아, CD 체험해 봐야지. 부탁해”라며 떠나는 CD님, “위기는 곧 기회니까요”라며 응원하는 후배에게 이제부턴 내 마음대로 촬영할 테니 걱정 말고 가라고 쿨하게 말하고 돌아서는데 커피를 쥔 내 손은 왜 그렇게 떨렸던 걸까? 아마 아침 공기가 차서 그랬을 거야…

그렇게 제작팀을 보내고 나는 시험지를 받아 든 수험생처럼 휙 보고 지나갔던 콘티의 장면들, PPM에서 광고주와 협의했던 모든 내용들을 치열하게 떠올리기 시작했다. 넘어갈까요? 다시 갈까요? 이대로 갈까요? 아니 이렇게 신경 쓰고 결정할 것이 많았는가? 집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현장의 스탭들은 광고는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걸 실감케 해주었다. 감독님과 피디님은 빠른 결정과 커뮤니케이션으로 찍어야 할 컷들을 지워 나갔고 현장의 스탭들은 이런 건 위기도 아니라는 듯한 일사불란한 준비로 홀로 남은 카피라이터를 안심시켰다. 자, 이건 위드 코로나 시대를 살아갈지도 모르는 여러분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제부터라도 PPM에 더 열심히 참여해서 같은 위기를 맞이하더라도 떨지 말고 촬영에 임해보자.

3. 개그의 위기

두 번째 소개할 위기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위기의 종류로 아직도 직면하게 되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일정이 당겨지면 안자면 되고, 견적이 줄었으면 안 먹으면 되고, 오타가 생겼으면 싹싹 빌면…아… 이것도 아찔한데? 아무튼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위기 중에서 한 에피소드를 소개해 본다.

성대모사나 개그 연기 욕심으로 저연차부터 종종 CD님들의 제안으로 (아주)높으신 분들 앞에서 유머 소구의 시안을 설명하는 기회가 주어지곤 했는데 그래도 성공률이 꽤 높은 편이라 자부했던 어느 날 나에게 들려온 모 브랜드의 임원의 한 마디. “재미없는데요?” ‘모르겠는데요?’ 혹은 ‘재미있는 건가요?’도 아니고, 그냥 ‘재미없는데요.’라니! 이 간단하고 차가운 한 마디에 심박수는 최대치로 올라간다. (저기요, 부사장님. 저 개그맨 공채도 지원해 본 사람인데요?) 지금껏 한 연기 중에 가장 완벽했는데?

개그라는 게 얼마나 어렵고 주관적인 것인지 내가 왜 떨어졌는지 알게 되는 순간, 하지만 그렇다고 탈락자처럼 내년에 다시 오겠습니다 하고 돌아설 순 없다. 내겐 이 아이디어를 함께 내준 동료들이 있지 않은가? “제가 다시 웃겨, 아니 다시 설명 드려 보겠습니다.” “이게 제가 해서 덜 웃긴 거고 모델이 하면 훨씬 웃기고 반응이 좋을 겁니다.” “덜 웃기면 이 부분은 빼겠습니다. 촬영만 하게 해주세요.”

폐지될 뻔한 아이디어를 겨우 소생시키고 나면 매번 이들을 귀신같이 살려낸 건 내 설명보다 훨씬 재밌게 의도를 살려준 모델들, 편집감을 살려 개그의 여백을 없애준 실장님, 생각지도 못한 자막과 2D 효과를 넣어 주시는 후반 스태프들이었다. 진짜 나는 그분들이 살려낸 개그 덕분에 아직까지 재미있는 광고 만들며 먹고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 재미가 없다는 피드백을 받는 위기의 순간에도 결코 당황하지 말라. ‘신에게는 아직 수없이 많은 가능성이 있사옵니다.’

4. 발단-전개- 위기 그리고 절정-결말

누구에게나, 어떤 순간에도 위기는 있다. 물론 광고를 만드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는 스토리의 순서상으로 위기 다음엔 절정과 결말이 온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위기의 순간 마치 고대 설화 속 위기에 등장하는 조력자 같은 존재들 덕분에 기분 좋은 절정의 순간도, 힘들었던 위기의 프로젝트도 매번 기분 좋은 결말을 맞는다.

나의 수많은 위기 극복을 함께해 준 모든 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위기도 미리 잘 부탁드린다는 대책 없는 말씀을 미리 드려본다. (그러고 보니 탈출의 능력은 없지만 탈출의 NO.1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그 어떤 ‘위기’의 상황의 기미조차 일어나질 않길.

제일기획 박상준 프로 (제작본부)

본 칼럼은 ‘The AD’에 게재됐습니다.